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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와 커피 사이, 그 어디쯤

베란다의 빨래들 사이로 흔들리는 내 마음처럼

by 해이


앞을 다투며 찬 공기를 턱밑까지 들이밀더니,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연이틀을 넘기고 있었다. 아랫집 사는 보리밥집 할머니도, 윗집 사는 치킨집 사장님도 빨래건조기를 쓴다는데 우리 집은 여전히 베란다에 손수 널어 말린다. 이런 날씨 속에서 빨래는 자신이 간직한 물기를 다 털어내지도 못한 채 오히려 공기 중 습기를 더 품어버린다. 복잡한 머릿속을 비추기라도 하는 듯 날씨는 맑아질 기미가 없다. 하늘을 메운 구름들은 입금을 재촉하는 문자들을 보는 내 속만큼이나 시커멓다.


쌓이는 빨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열린 세탁기 문이 세탁물을 삼키는 건지, 나를 삼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23kg 짜리 드럼 세탁기가 꽉 찼다. '덜덜 덜덜' 세차게 돌아가던 세탁기가 경고음을 내며 멈춰섰다. 눌러 담겼던 옷들이 서로 뒤엉켜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둔 10L짜리 주전자에서 "삐이"하는 기차소리같은 경적이 울려퍼졌다. 끓는 주전자처럼 관자놀이에서도 증기가 뿜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서둘러 가스레인지 불을 꺼놓고는 결국 빨래를 다시 하나씩 꺼내 바구니에 덜어냈다.


햇볕에 누렇게 변해버린 빨래바구니를 가져다가 3분의 1 정도를 덜어내고 나서야 세탁기가 겨우 돌아가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며 기계음을 뿜어내는 소란이 오히려 안정감을 주는 것 같았다.

'이제야 잘 돌아가는구나.'


돌아가는 세탁기를 뒤로 하고 주방 식탁에 앉아 잠시 여유를 즐긴다. 재작년 겨울에 선물 받은 크리스마스 기념 머그컵에 잘 마시지도 못하는 믹스 커피를 한 잔 타다가 한 모금 입에 담았다.


커피잔을 쥔 오른손이 금세 뜨거워져 왼손으로 옮겨 쥐었다. 나는 그 순간을 몹시도 좋아한다.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그리고 또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겨가며 남는 뜨거움은 마치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전해주는 듯했다. 이 한 잔을 모두 마시면 나에게는 머잖아 어지럼증이 올라올 것이다. 그러면 또 '왜 커피를 마셨을까.' 하며 후회하겠지만 무릇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반복하는 무모함과 별것 아닌 것임을 알면서도 미리 하는 걱정을 안고 사는 것.


잠시의 상념을 세탁 종료음이 방해한다. 다 마시지 못한 커피잔을 개수대에 옮겨놓았다. 아쉬운 입을 쩝 하고 다시며 세탁기 문을 열었다. 이리 엉키고, 저리 엉킨 빨래들을 꺼내 머리 위 건조대에 널고 있자니 젖혀진 목이 아파온다. 낡은 방충망을 타고 비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들어와 건조대에 널린 빨래들을 뒤흔든다. 바람에 흔들리는 티셔츠 소매가 축축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래로 축 처져있지만, 금세는 아니더라도 이미 건조대에 걸린 만큼 언젠가는 마를 것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어쩌면 나 역시 아직은 눅눅함이 가득한 상태이지만, 이렇게 흔들리는 사이에 조금씩 건조되어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변덕스러운 날씨는 언제 다시 비를 가지고 올지 알 수 없지만, 마르는 시간 동안 내 몫으로 받아들이며 가을바람에 몸을 맡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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