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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커피 그리고 고양이

가을 볕을 쬐는 고양이들처럼

by 해이



계절이 바뀌는 일은 대단한 사건은 아니라지만, 아침 공기가 유난히 차갑게 스며드는 날엔 하루를 시작하는 일조차 버거워질 때가 있다. 출근길에 스치는 바람이 몸보다 먼저 마음을 움츠러들게 할 때면, 다림질되지 않은 감정이 그대로 접힌 채 가방 속에 구겨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수십년을 견딘 직장인의 몸은 적응을 반복하지만, 마음은 그만큼 단단해지기보다 점점 더 얇아지는 방향으로 학습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수록 하루를 시작하기 위한 방식 하나쯤은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나에게 그 방식은 커피다. 몸이 카페인을 곱게 받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출근하자마자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거나 편의점에서 사 온 핫초코 컵 위에 믹스커피를 털어 넣는다. 가끔은 기분이 가라앉는 날이라서, 또 가끔은 유난히 추운 날이라서 달콤함과 쓴맛을 동시에 삼켜야만 정신이 붙잡히기도 한다. 때로는 믹스커피 한 봉지만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차라리 몸이라도 덜 괴로운 하루를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방식이든 이 첫 잔 없이 업무 앞에 앉는 일은 낙엽도 달라붙지 못할 만큼 말라 있는 콘크리트 위에 그대로 넘어지는 일과 같다.


커피를 들고 창가에 앉으면, 맞은편 건물 옥상에 늘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고양이 두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삼색 털의 어미 고양이와 치즈빛의 어린 고양이. 그들은 바람이 차가워도, 지붕 위 낙엽이 사방으로 흩날려도, 볕이 머무는 자리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 같은 지점에 앉는다. 그러다가 햇빛이 천천히 그들의 털 위에 내려앉으면, 눈을 가늘게 감으며 그 온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 서두름은 없다. 온기가 다가오는 순간을 믿는 존재에게는 추위 또한 잠시 머무는 조건일 뿐이다.


커피는 끓인 직후엔 쉽게 마실 수 없고, 완전히 식어버리면 다시 마실 이유를 잃는다. 식어버린 믹스 커피의 맛은 어딘가 비릿하며, 끈적하다. 목 뒤로 삼키기에 가장 적당한 맛이 살아나는 순간은 생각보다 짧고, 그 순간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그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혀를 데어 보고서야 비로소 다시 떠올린다. 적당한 온도를 기다리는 일조차 번거롭게 느껴지는 마음은 대부분 "지금 당장"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조급함은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 하루가 마음 깊숙이 스며드는 것을 막아버리곤 한다.


고양이들은 햇볕이 도착하기 전까지 조용히 털을 고르고 앉아 있다. 그늘 속에서도 불안해하지 않고, 볕이 닿는 시점을 서두르지 않는다. 그들의 태도는 기다림을 소모가 아닌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비롯된 듯 보인다. 그런 장면 앞에서 나는 문득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왜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온도를 억지로 삼키며, 다칠 것을 예상하면서도 서두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가. 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에 마음이 먼저 뛰어가 상처를 남기게 되는가.


결국 커피는 자신의 속도로 식어가고, 햇볕은 늘 비슷한 시간, 비슷한 위치에 도착한다. 그 속도를 앞지르려는 노력은 대개 스스로의 에너지만 소진시킬 뿐, 시간을 재촉하지는 못한다. 기다림은 때로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능력이자 자신을 소비치 않고 하루를 견디기 위한 하나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커피가 적당히 식었을 때, 비로소 한 모금이 자연스럽게 식도를 타고 흐른다.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이 하루를 완전히 소화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음미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컵을 내려놓고 업무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옥상 위의 고양이들은 여전히 햇볕 속에 몸을 맡기고 있다.


나는 아직 그들처럼 기다림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커피 한 잔이 식기를 기다리는 정도의 여유를 배우는 중이며, 그 시간 안에서 하루를 받아들일 최소한의 온도를 찾으려 한다. 완전히 뜨겁지도, 완전히 식지도 않은, 한 모금 삼킬 수 있을 만큼의 온도에서 오늘도 하루는 시작된다.


(*필자는 카페인에 몹시 취약한 몸을 가지고 있다. 섭취 후에도 잠은 잘 자지만, 눈 앞에 껌껌해지고 손이 떨리거나 100m 전력질주 후처럼 심장이 크게 뛰는 등의 부작용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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