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쌌어?)
어디 하나 기댈 곳이 마땅치 않은 불안함에 마음이 잔뜩 점칠된 날이면, 나는 또 습관처럼 브런치를 기웃거린다. 머릿속엔 들어오지도 않는 글자들을 억지로 뒤쫓아보지만, 눈은 글을 읽는 척만 할 뿐 자꾸만 멍하니 흐려진다. 그리고 금세 눈가에 눈물이 한방울씩 고이고 만다. 이게 안구건조증 때문에 튀어 오른 조건반사인지, 진짜 마음이 아파서 밀려온 물인지 도통 구분이 안 된다. (참, 살다 살다 별걸 다 헷갈린다니까.)
창밖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가지 끝마다 걸린 은행잎 사이로, 평소엔 고약하다며 사람들이 인상부터 찌푸리는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마치 아무나 건들지 말라는 듯한 그 냄새엔 사실 그럴듯한 이유가 숨어 있다. 암나무의 씨앗 껍질엔 '빌로볼'과 '헵탄산'이란 독성 성분이 들어 있어서, 곤충과 동물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보호한다. 사람들에게는 미움받을지 몰라도, 나무는 그 방식으로 자신이 남길 생명을 지킨다. 누군가에게 지독한 존재일지언정,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버틸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어쩌면 요즘 비슷한 냄새를 풍기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 마음이 아프고 여유가 없어진 날이면, 나 자신도 모르게 주변에 '가까이 오지 마' 하는 기운을 풍기고 있었을지 모른다. 누가 그랬냐고 따지면 딱히 그런 사람은 없는데도, 괜히 지키고 싶고 숨기고 싶고 무너지기 싫은 마음 때문에 이상하게 예민해지는 시기. 사람들한테는 괜히 까칠해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내 안쪽에 있는 연약한 씨앗 하나를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은행 열매가 지독한 냄새를 내는 이유도, 결국엔 '나를 지키기 위해서'인데, 인간이라고 다르겠나 싶다. 마음 깊은 곳에서 썩 나쁜 의도가 없더라도, 힘든 시기를 지나면 저마다의 냄새를 갖게 된다. 말수가 줄거나, 괜스레 날이 서있거나, 또 멀쩡한 척 웃으면서도 속으로 조용히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근다. 모두가 나름의 방식으로 겨울을 견디고, 씨앗을 내년까지 살아 있게 하려고 애쓰는 것뿐이다.
생각해보면, 삶이란 참 이상한 것 같기도 하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계절이 흘러가고 있지만, 속에서는 각자의 씨앗이 흔들리고, 다치고, 또 묵묵히 버티고 있다. 사람도 나무도, 결국엔 자기 안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조금씩 지독해지는 시기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다시 노랗게 물들거나, 다시 잎이 피거나, 다시 마음이 말랑해지는 날도 온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막상 지금은 마음이 자꾸 움츠러드는 걸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괜찮겠지. 은행나무도 매년 지독한 냄새를 견디고 나서야 새잎이 돋아나는 걸 보면, 나 역시 언젠가는 지금의 이 마음을 지나 새 계절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지금 흘러내리는 눈물 한두 방울도, 다음 계절의 나를 위한 보호막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사실은...
아무리 그럴싸한 의미를 붙여도 은행 열매는 결국 지독한 응가냄새다.
응, 그 냄새.
코를 찡그리게 만들지만, 그 안에서도 어쨌건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생명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그러니까... 지금의 나도 좀 지독해져도 괜찮겠지.
지나보면, 이것도 언젠가 "아, 그때 나도 참... 은행 열매 같았네." 하고 웃으며 기억할 수 있겠지.
히히 :D
변덕스러운 날씨만큼이나 제 마음의 정체를 알기 어려운 상황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 탓에 작가님들께서 정성스럽게 남겨주신 댓글들에 답을 드리는 속도가 많이 느립니다.
그래도 감사한 마음만큼은 단 한 번도 줄어든 적 없어요.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마음이 가라앉는 대로, 차근차근 인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