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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흐리니까, 비가 왔으면 좋겠어

푸념

by 해이



그런 날이 있다.


계획했던 모든 일들이 헛수고였다는 걸 확인하는 날,

같은 말, 같은 어투의 대화가 유난히 상처로 들리는 날,

세상이 오직 나만 괴롭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


그래도 내일을 살아야 하기에

가까스로 엉킨 실타래의 끝을 더듬어야 하는 날,

이 감정에 잠식되지 않으려 정신을 붙잡아야 하는 날.


잠깐의 좌절도 사치인 이 순간,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계속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결국 삶은 감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실수 하나가,

어떤 날에는 모든 것을 뒤흔든다.


조작 실수로 휴대폰 속 400여 명의 번호가 모두 사라졌다.

기억나는 번호와 연락 내역을 더듬어 다시 저장하니

스무 명 남짓. (그나마도 가족과 거래처가 전부)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피식 웃음이 난다.

수백의 이름이 흔적도 없이 지워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번호 하나 얻기 위해 오갔던 수많은 대화들,

정성스레 저장하던 그 순간들.

그렇게 쌓아 올린 인연들이

실은 얼마나 덧없었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저번 주쯤인가,

십여 년 만에 동창에게 연락을 건넸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나았겠다는 생각을 남겼다.


살다 보니

마음을 건넬 수 있는 인연들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말았다는 걸,

다시금 깨닫고 나니

인생은 참 별것 없구나 싶다.


그리고 또다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