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 하지는 마십시오
당연한 말을 늘어놓자면, 제조업은 제조를 해야 하고 제조를 하려면 제조 방법이 필요합니다. 해일막걸리의 경우는 제조품이 막걸리인 경우이고요. 판매할 수 있을만한 막걸리의 제조법을 얻기 위해서는 통상 R&D라는 과정을 거쳐야겠죠.
그런데 해일막걸리의 탄생 비화를 읽어 주신 분이라면 이미 짐작하시겠만 여기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창업 전에 연구개발을 배우지도, 해보지도 않았다는 거예요. 대학에서 식품산업관리학과를 복수 전공할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는데 농축산물을 주로 배운다는 이야기에 마음을 접었었거든요. 쉽게 포기하지 말걸, 인생은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거였습니다.
R&D의 기본도 모르지만 왠지 환경을 통제해야만 할 것 같았어요. 정확한 비교를 위해서는 원하는 변수 하나만 딱 변경하는 게 맞으니까요. 하지만 이 생각은 레시피 개발의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을 갖고 있지 않았거든요. 매장을 얻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처음 술을 빚을 때는 매장은커녕 사무실도 없던 때라서 쓸 수 있는 곳이 집 밖에 없었습니다.
집에서 빚어 봤자 계절에 따라, 온도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텐데. 지금 술을 빚어도 유효한 결과가 나오는 걸까? 이런저런 걱정을 재다 보니 술을 빚을 결심을 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고민하다가 가양주를 알려주셨던 교육 기관 선생님한테 여쭤봤더니, 그냥 집에서 빚어서 냉장고에 보관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걱정이 말끔히 해결된 기분은 아니었지만 일단 집에서 첫 술을 빚기로 했습니다.
처음 빚은 술은 정말 이상한 비율로 빚은 이양주였는데, 운 좋게도 아주 맛있는 술이 나왔습니다. 초심자의 행운이랄까요. 이 술을 더 여러 번 담가서 안정적으로 맛을 재현할 수 있는 제조법을 완성하는 게 맞는 순서이지만 이때 쓴 누룩이 꽤 비싼 거라서 과감히 다른 레시피로 두 번째 술을 빚게 됩니다.
두 번째 술을 빚을 때는 한여름이었는데, 저는 정말 웬만한 폭염이 아니면 에어컨을 틀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 술은 완벽한 고온 발효 상태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피곤하다는 이유로 채주를 미뤄서 참 오래도 발효했어요. 이때 고온 발효를 하면 참 시고, 쓰고, 떫고, 향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 후에도 드문드문 술을 빚다가 드디어 제 양조장을 만들게 되었죠. 샌드위치 패널로 가벽을 세워서 어느 정도 온도 방어가 되는 편인데, 그래도 계절은 탔습니다. 그래도 집보다는 온도 유지가 되겠지 하고 다시 술을 빚기 시작했어요. 주류제조면허도 신청해 둔 상태니까, 얼른 레시피를 짜야 판매 허가가 나오자마자 술을 팔 수 있죠.
이때 인턴십을 하고 있는 양조장 대표님의 도움으로 당화력 개념도 복습합니다. 그리고 계속 누룩으로만 실험하던 레시피에 정제효소를 추가했어요. 정제효소로 기본 당화력을 높인 술도 빚어 보며 비교 관능도 해보았습니다. 정제효소를 쓰면서 찹쌀이 아닌 멥쌀에서도 충분한 단맛을 끌어낼 수 있음을 알게 된 게 최대 수확이었어요.
재미를 붙인 저는 이제 효모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아시다시피 전통 누룩에는 온갖 미생물들이 있어서 어떤 미생물을 특정해서 사용하기는 힘들거든요. 효모의 종류도 정말 많고, 사실 제빵용 효모나 와인 효모, 맥주 효모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저는 국세청 주도로 개발했다는 탁주 효모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효모 팩을 개봉하니 익숙한 꽃향과 과일향이 나더라고요. 아직까지 그 향을 극대화하는 건 실패해서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여전히 온도 컨트롤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시간이 나면 술을 담고 있습니다. 다행인 건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원하는 맛을 낼 수 있는 우회적인 방법을 발견했어요. 술 한 독을 완벽히 조절해서 풍부한 향미의 원주를 만드는 정석적인 방법은 아니지만요. 새로 터득한 제조법을 좀 더 세심하게 조정하면 제가 원하던 순곡주를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
한 가지 좋은 소식은 최근 양조장에 드디어 냉온풍기를 설치했다는 거예요. 발효통 하나하나 온도 조절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양조장 내 기온은 조절할 수 있게 되었어요! 조만간 양조장 청소를 마치고 최적의 온도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R&D 전문가 분들이 보신다면 기본이 되어 있지 않는 환경에서 참 얼렁뚱땅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어느 정도 경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 머릿속으로 세워 본 이론을 검증해 보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분께 감히 추천드리지는 못하겠어요. 아무래도 정확한 방법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이 요상한 R&D는 계속됩니다. 해일막걸리에 불이 켜져 있다면, 해일이 또 술을 빚고 있나 보구나 생각해 주세요. 만인의 취향에 꼭 맞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제가 자신있는 술을 선보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