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비는 온다

<2020년 9월호>

by 성해인

9월의 가을비는 제법 시리웠다. 샛노오란 단풍잎이나 고추잠자리 한 마리 볼 수 없었지만 쌀쌀한 비바람만으로도 충분히 가을이었다. 하루를 가득히 채웠던 여름의 흔적들이 소나기에 조금씩 씻겨가더니 어느덧 가을바람을 타고 저 멀리 날아간다. 무엇을 떠나보낼지, 어떤 순간을 기억 속에 남길지를 정리하는 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의 스무 번째 계절은 낭만도, 추억도 머물지 못한, 발가벗은 채 홀로 서있는 초겨울의 단풍나무 같은 시기였다. 야속하게 내려오는 빗물에 나이테가 새겨지는 그 고통이 무뎌지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 비는 어떤 우산으로도 가릴 수 없는 시간이라는 폭우였다.


이십층높이의 우리 아파트 옥상에선 동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물과 기름처럼 나뉜 하늘과 도시, 별빛과 불빛의 환상적인 데칼코마니, 발가벗은 채 사랑을 나누는 별과 달까지,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들이 이곳엔 존재한다. 가을풍의 바람이 늑골을 스쳐와 나의 적요함을 또다시 우롱하지만 그래도 그저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내 안엔 그에 대항하는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그 기억들은 밤하늘의 별들처럼, 단풍나무에 핀 단풍처럼, 참으로 알록달록했으리라.


태풍이 지나가고, 비바람이 휩쓸고 간 거리의 평온함에 잠이 든 나를 깨운 것은 하찮은 진동소리였다. “아들 어디야"라는 문자에 "지금 집 가는 중" 이라며 급하게 문자를 수습한다. 이곳에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1시간 동안 하늘의 풍경을 바라보았나 싶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말을 한 것보다도 속이 개운해졌다. 밤공기에 마중을 나가듯 서서히 아래로 내려간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에 발을 디딜 때마다 또 다른 계절을 맞이하러 가는 느낌이 들어온다. 여전히 익숙한 마당의 풍경과 클락션 소리에 향수를 느끼며... 이제는 저물어버린 계절에 그리움 같은 것을 느끼며... 비가 내리 적셨던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어딘가에 있을 나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날도 비가 내렸다. 장마에, 태풍에, 온갖 축축한 것들이 이불속으로 들어와 나는 침대에 녹아버렸다. 벌써 일주일째,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엔 녹슨 쇠덩이 같은 냄새가 났다. 창밖의 풍경은 고장 난 시계라도 되는 듯 엉뚱한 시간을 가리키고 있어 어제가 가장 친한 친구의 생일이었다는 사실도 잊게끔 하였다. 일도, 공부도, 친구도, 먹구름은 게을러지고 싶은 내게 있어 꽤나 좋은 핑곗거리였다. 스스로를 뿌연 안개 밭에 던져놓은 채 길을 잃은 행인 흉내를 내며 침대에 늘러 붙어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무기력한 날이 반복되어 그것을 일상이라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느낄 때쯤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외삼촌이었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은 외갓집에서 살았다. 마당도 있고 층계도 있는 단독주택이라 여러 세대가 살았었지만 10살 때 그곳을 떠나 어느덧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그곳이 나의 집이다. 어린 나를 10년간 길러준 사람들과 그 추억은 당연히 값지다...라고는 끄적였지만 그곳을 들린지도 벌써 3개월이 흘렀다. 삼촌은 놀러 오라며 전화를 주었고 나는 부랴부랴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외갓집은 농사를 지어 도시에서 조금 외곽으로 들어가야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촌이지만 크게 어색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워낙에 어렸을 적부터 자랐던 곳이라 그 근처만 가도 마음속에서 편안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비가 계속 내리는 탓에 땅바닥이 퉁퉁 불어 가는 길이 고되었다. '아 그냥 집에 있을 걸 그랬나..' 몸은 그곳에 도착했지만 마음은 한참 전에 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비가 좀 그쳤으면 갈 만하겠는데..' 그래도 비는 계속 왔다.


그곳에 도착한 후 저녁 시간이 되자 농사일을 마친 외가네 식구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들어왔다. 모두 옷이 다 젖어있었다. 머리부터 바지 아랫단까지 모두 울상을 지어 눈물을 터트린 것만 같았는데 해인이가 오랜만에 왔다며 얼굴엔 웃음을 보이셨다. 난 비를 피해 집에만 숨어있었는데 사촌들은 비를 맞으며 온갖 고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주머니에서 용돈을 꺼내 주셨다. 요새 농사가 잘 안된다고 말하지만 용돈을 건네주시는 주름진 손을 보자 너무 미안했다. 난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일방적으로 와서 돈을 받아가는 것이 맞나 싶었다.


집에 도착하자 잠시 멎었던 비가 다시 내리더니 장대비를 내리쏟기 시작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비를 맞아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침대에 누워 몸이 편안한 상태로는 무언가 마음에 걸려 잠에 들 수 없었다. 우산을 꺼내 들어 젖어도 상관없는 누더기 하나를 걸친 채 창밖에서만 봤던 풍경을 직접 밟으러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방금 말린 애인의 젖은 머리 같은 향이 콧등 위에 내리 앉았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뒤엉킨 기억들이 하나둘 드러나더니 어느새 거대한 파도를 이뤄 날 집어삼켰다! 피할 수도, 맞설 수도 없는 파도에 휩쓸리듯 난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래서 추억에 젖는다고 하나보다. 노란 등불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수로길에 이르렀다. 먹구름에 이어폰을 꽃은 채 아무 생각 없이 계속 걸었다. 그래도 나름 큰 우산을 들고 갔지만 비가 너무 거세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운동화엔 물이 가득 찼고 나는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다. 집에 혼자 앉아 바라봤던 근사한 풍경들은 온데간데없고 하늘의 빗방울이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창밖을 흘기며 펜대를 굴리는 나의 고민은 정말 복에 겨운 고민이었다. 비가 앗아간 무언가를 그리워하면서도 비를 맞을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나기만 내려도 울상을 짓고 모든 것을 한탄하기 바빴는데, 그들은 항상 주룩비가 내리는 마음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 눈가에도 주룩비가 쏟아진다. 비는 한참 전에 그쳤지만 눈가엔 계속해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것은 꽤나 따듯한 빗방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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