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당하는 게 일입니다

by 해강


진정한 프리랜서 번역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절대로 피해 갈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기획서 돌리기’다.


물론 이 일은 외서기획자를 겸한 번역가에게 해당하는 일이기는 하다. 보통 이 업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는 햇병아리 번역가에게 출판사들이 알아서 연락해 ‘이 책을 좀 번역해 주십시오.’라고 할 일은 없다. 절대 없다. Never. Ever. 심지어 번역을 잘해도 없다!


그러니 프리랜서로서의 생존율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번역가이지만 동시에 기획팀장이자 영업사원까지 되어야 한다.




기획서를 쓰는 건 꽤 번거로운 일이다. 대략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스스로 발굴해 낸 책을 읽고,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 판단의 논리를 ‘사업 제안서’처럼 정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왜 이 책이어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일종의 PPT 프로젝트 발표인 셈이다.

조별 과제를 해본 대학생들, 회사에서 발표를 해본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테지만, 장점을 ‘있어 보이게’ 쓰기 위해 말들을 고르고 다듬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며 기획서를 읽을 편집자의 입장을 고려해 요약의 결까지 다듬고, 심지어는 시장성 비교 포인트까지 넣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출판사별로 소위 말하는 책의 ‘추구미’도 다르니 그에 맞춰 책의 주제와 기획 방향도 세심하게 고민해야 한다.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게는 사흘에서 나흘, 길게는 일주일에서 한 달도 넘는다.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애착이 남다른 책인 경우에는 발췌 번역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두 달 동안 수정을 거듭한 적도 있다. 물론 여기서 책을 읽는 시간은 제외해야 한다. 나는 책을 꼼꼼히 분석하며 읽는 편이라 책 읽는 시간도 꽤 오래 걸리는 편이다. 그렇게 힘겹게 완성한 기획서를 첨부해 메일을 보낼 때도 메일 본문에 들어갈 인사말이나 기획안을 보내는 이유 등등을 아주 세심하게 작성한다.




하지만 그렇게 정성을 들여 보낸 메일이, 종종 아무 대답도 없이 잊히고 만다. 그냥 묻혀버리는 것이다. 아무 말도, 반응도 없이.

출판사는 제각각 규모도 모두 다르고 내가 보내는 외서기획안 말고도 하루에도 수백, 수천 통의 기획안이 쏟아진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러니 하나하나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 문학작품이 어느 때보다 잘 팔리고 있는 요즘, 일본 소설이나 에세이가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도 사업가로서의 당연한 계산일 터.


<번역가의 2차 전직> 편에서도 썼다시피, 나는 LGBTQ 전반에 관심이 있어 많은 기획서가 퀴어를 주제로 하고 있다. 퀴어 콘텐츠가 불편하다는 말을 누가 직접 한 건 아니지만, 시장성이 없다는 말 속에 그 불편함이 조용히 스며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가 고른 책들이 유독 자주 무반응으로 묻힐 때면, 괜히 그런 상상을 하게 된다.


나에게 기획서를 보내는 일이란 결국 책이라는 형태를 빌려 나의 신념을 보여주는 일이라 그런지, 어떤 답도 없이 사라지는 침묵 속에서는, 책뿐 아니라 내가 통째로 거절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상처도 크다.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필요하고 상처를 치유해 줄 약 같은 책들이 너무 작고 미미한 존재처럼 느껴질 때.

내가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마저 함께 사라지는 것 같다.

그럴 때면 내 안에 있던 믿음이 넘치던 의욕과 함께 휘청거린다.

어찌 보면 이 감정들도 전부 나의 욕심이고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푸념일지 모르지만.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제가 보낸 기획안을 채택해 주세요.’라는 게 아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 게임 속 NPC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지옥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가끔은 어떤 내용이든 좋으니 화면 뒤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답장 같은 것이 오면 좋겠다.

당연히 거절할 수도 있으며 우리 모두 거절을 이미 각오하고 있다.

거절 메일이 이미 만들어놓은 ‘복붙 문장’일지라도 그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는 경험해 본 사람만 알 수 있다.


아카데미에서 만나 지금까지 함께 정보를 공유하거나 공부하고 때로는 같이 으쌰으쌰 하며 힘을 북돋아 주는 동료 친구들이 있는데, 어느 날 한 언니에게 나의 그런 무거운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사실 자주 한다).


“너는 아직까지 그걸 신경 쓰고 있으면 어떡해? 그러려니 하면서 마음 편하게 있어. 안 오면 안 오는갑다~, 오면 왔는갑다~. 안 그러면 지쳐서 일 못 해.”


아주 지당한 말이었다. 메일 하나 하나에 온 힘을 주고 긴장해 봤자 어차피 지치는 건 나뿐일 테니까.

그렇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누군가는 기획서를 보낸 후 한참 동안 답이 없어도 그러려니 할 수 있고 누군가는 내심 며칠 내내 마음 졸이며 끙끙 앓기도 한다.

정말 안타깝게도 나는 후자에 속하는 인간이다. 나도 그런 강철 멘탈이 탑재된 인간이면 얼마나 좋을까.


답장이 오지 않는 메일함을 며칠 동안 계속 새로고침 하며 한숨을 내쉴 때도 있고 혹시 파일을 잘못 보낸 건 아닐까 다시 열어 한 글자 한 글자 확인해 보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다가 메일이 왔다는 알림에 화들짝 놀라 메일함을 열었더니 기다리던 답장이 아니라 관련 없는 설문조사 요청 메일일 때의 심정이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상상하는 것만으로 손끝이 아려온다. 흑흑…….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종종 이어져 오는 일이기는 하지만 멀쩡히 힘을 내 열심히 달리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날이 있다.


열심히 달리는 나날들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치 유노윤호의 열정 짤처럼 긍정 에너지가 넘쳐나는 시기인데,

아무리 열정이 넘쳐도 적절한 보상이 따르지 않으면 열정 불꽃도 꺼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엄습해 오는 불안감과 자괴감을 참지 못하고 하루 종일 침대 이불속에 파묻혀 엉엉 울기도 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전부 다 무의미한 수고가 되면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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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서를 보내는 손이 민망해지는 순간들도 있다.

메일을 보내도 아무 답장이 없고 그 무반응에서 오는 무기력감과 자존감 하락.

그렇다고 안 쓰고 안 보낼 수도 없는 현실.

그럴 때면 나는 꼭 ‘미련을 못 버리고 질척거리는 전애인’ 내지는 '성냥팔이 소녀' 된 기분이다.



생각해 보면 길거리에서 치킨집 전단이나 헬스장 전단을 받는다고 해서 일일이 그 영업장에 전화를 걸어

“이 집 치킨은 제 입에 안 맞아서…….” 라든지 “이 헬스장은 운동 프로그램이 좀 부족한 것 같아요.”라고 말해줄 필요는 없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는 나도 일종의 전단을 뿌린 것과 마찬가지지만, 아무 반응이 없을 때면 어딘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좌절을 맛본다.



사람들이 말하는 ‘열정페이’는 보통 조직 속 이야기지만, 프리랜서 번역가는 누구의 요구도 없이 혼자서도 열정페이를 지불하고 있다.

일을 따기 위한 열정, 읽히기 위한 열정, 살아남기 위한 열정. 거절당하는 것도, 읽씹당하는 것도 ‘하고 싶은 일’이라는 명목하에 꾹꾹 삼켜내야 하는 것이다.



열심히 하면 뭐라도 된다고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은 운 좋을 때만 유효한 주문처럼 느껴질 때도 많다.

신은 이겨낼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준다지만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의 말은 들을 수 없다는 유명한 짤이 있다. 최근에는 이 짤들에 정말이지 깊은 공감을 하는 바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토록이나 지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오는 건, 기획서에 나의 모든 정성과 열정을 쏟아부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두운 신호들은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가 된다.




아이고. 쓰다 보니 아주 징징거리는 글이 되어버렸다.

재미있고 신나게 일하면서도 ‘꾸준하기’가 때로는 얼마나 지치고 고된 일인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렇게 꿈도 희망도 없는 글로 끝낼 수는 없으니 좋은 이야기도 조금 써보겠다.


‘일은 원래~가 이렇게 힘든 거다.’

‘세상 대부분의 일은 제안하고 거절당하는 거다. 우리 아빠도 이렇게 산다!’

‘힘든 게 당연하다. 안 힘들면 그건 노동이 아니라 유희지.’

‘나는 꾸준히 실패하며 야금야금 좋아지고 있다.’



이런 주문을 달달 외우며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끊임없이 기획서를 보내다 보면

좋은 관계를 맺게 되는 출판사들도 생기기 마련이다.


기획서를 보냈다가 함께 만화 작업을 하게 된 곳도 있으며

기획 방향과 번역 모두 좋았으나 원서의 자료 구성상 출간 방향과 미묘하게 맞지 않아 안타깝게 되었다면서 감사의 의미로 아주 두꺼운 책을 보내준 곳도 있었다. 다음에 또 다른 기획을 한다면 언제든 편하게 연락 달라는 따스한 말과 함께.



또 하나, 무응답과 거절이 주는 선물은 나와 결이 맞는 곳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크든 작든 상관없다. 누군가, 어딘가는 반드시 나의 신념과 정성을 알아봐 주는 곳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함께 일할 때 더 큰 시너지 효과가 난다. 자료 찾기도 즐거워지고 서로 더 좋아졌으면 하는 마음에 추가적인 일도 기꺼이 하게 된다.

이건 내가 경험해 봐서 하는 이야기인데, 정말이지 아주 보람찬 노동의 시간들이었다!



숱하게 거절당해도 버릴 경험은 하나도 없다.

계속 실패하면서도 계속 일어나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기회가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번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작품을 투고하는 나를 포함한 병아리 작가들에게도 꼭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겠는가. 내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니 그냥 묵묵히 하는 수밖에.

나이키 광고에서도 “JUST DO IT.”이라 했다.

좌절이 우리를 부수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또 하나의 기획서를 보냈다.


거절당하는 건 우리의 일이고, 나는 그래도 여전히 이 일을 사랑한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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