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어학연수 제2장 #6 포르투(2), 기마랑이스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6 포르투( 2)포르투 근교여행, 기마랑이스.
포르투갈의 역사가 시작된 곳은 어디일까요? 포르투 근교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기마랑이스입니다. 기마랑이스가 어떤 곳인지 함께 가볼게요.
포르투는 이미 내게 너무 익숙한 곳이라 하루 정도는 안가 본 곳을 가봐야 재탕인 포르투 여행이 나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눈에 띈 도시는 '건국의 도시'로 불리는 기마랑이스(Guimaraes)다. 포르투가 처음이라는 룸메이트는 포르투를 더 보고 싶어 했고 우연히 포르투에서 이틀 동안 일정이 겹친 J는 함께 기마랑이스를 여행하기를 원했다. 혼자 여행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여행 동행자가 생기니 더 좋았다. 아침 8시 15분 포르투 상벤투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1시간 15분 남짓을 달려 기마랑이스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기마랑이스는 페나 산에 있는 페나 성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볼거리는 역사지구에 몰려있는데 기차역에서 걸어서 10~15분 정도면 되고 게다가 모두 걸어서 돌아볼 수가 있다. 포르투 근교여행 하루 코스로 포르투갈의 역사적인 측면이나 볼거리 측면에서 이만한 도시가 있을까 싶다. 가장 최적의 동선을 위해 기마랑이스 역에서 택시를 이용해 페나 성소를 먼저보고 역사지구로 이동해 주요 볼거리를 관람하기로 했다.
기마랑이스에서 가장 높은 곳 페냐 산에 잇는 페냐 성소에 도착했다.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한 관계로 근처 산장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맑은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성당으로 향했다. 기마랑이스를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건국의 도시'라는 점도 있었지만 산 정상에 있는 카르무 성모성당의 독특한 건축에 더 마음이 움직였다. 순전히 사진 한 장 때문에 찾아간 곳이라고 해도 좋겠다.
카르무 성모 마리아 성당(Nossa Senhora do Carmo da Penha)은 1947년에 완공됐으니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건물인데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는 작은 규모였다. 성당 앞 광장에 십자가 모양으로 물을 채워놓았는데 간결한 대칭구조의 파사드가 물에 반영으로 비치니 절로 마음이 경건해진다. 안으로 들어서니 스탠드글라스 창으로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이 내부 장식이라곤 하나도 없는 화강암 벽의 차가움을 어루만진다. 단아하면서도 정갈한 성당 안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고요해지는 느낌이었다. 어학연수 생활을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하고 건강하고 재미있게 지낼 수 있기를 빌었다.
성당을 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성당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와-' 절로 탄성을 내지르게 된다. 기마랑이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당이라는 의미는 바로 이것, 기마랑이스 시가지를 발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의 경건한 분위기로 인해 '전망대'라는 단어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성당의 한편을 내어준 느낌이랄까. 아직은 어디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멀리까지 조망되는 기마랑이스를 보고 있자니 십 년 묵은 체증도 단번에 날아가겠구나 싶다.
페나 산은 순례지다. 이 산꼭대기에는 성당과 또 하나의 성지인 교황 비오 9세(Pio IX Penha)의 동상 외에 성물을 파는 곳과 카페 등 종교와 관련된 시설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실제로 이곳으로 사람들이 순례를 왔던 곳이고 지금도 순례를 하고 있다. 성당에서 교황 비오 9세가 있는 곳까지 걷는 길에도 곳곳에 마치 십자가의 길처럼 종교적인 성물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성스러운 분위기도 괜한 것은 아니었다.
산을 내려갈 때는 성당 뒤편에서 바로 이어지는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잠깐 걷는 길인에도 산이 깊고 나무들이 울창해 미지의 숲에 온 기분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길을 따라 트래킹도 해보고 싶었지만 일행이 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다. 케이블카 타는 곳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사람들이 앉은 모습 위로 보이는 성당의 풍경이 예술이다. 마지막까지 경건한 마음을 꽉 채우고 페나 산을 내려왔다.
이제 본격적인 기마랑이스를 만나볼 차례다. 기마랑이스는 포르투갈의 첫 수도로 포르투갈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도시다. 특히 중세시대의 다양한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포르투갈 건축기행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도시가 바로 기마랑이스다.
그런 도시에서 가장 첫 번째로 만난 건 브라질 헤푸블리카 광장이다. 기하학적 모양으로 꾸며진 공공 정원은 기마랑이스 랜드마크 중 하나다. 헤푸블리카 광장은 성 구알테르성당과 알베르토 삼파이오 박물관 사이에 일자로 길게 늘어선 곳에 조성됐는데 왜 '브라질'이라는 이름이 붙어 잇는지는 아무리 찾아도 이유를 모르겠다.
브라질 헤푸블리카 광장에서 눈에 띄는 건 성 구알테르성당(Igreja e Oratórios de Nossa Senhora da Consolação e Santos Passos)이다. 이곳에서 포르투갈 최초의 프란시스코 전도사인 '구알테스 성인'을 기르는 축제를 매년 열면서 정식 명칭인 긴 이름대신 구알테르 성당으로 불리고 있다. 이 성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의 과정이 남아 있는 성당으로 유명하다. 원래는 7개의 성당에 있는데 현재는 5개의 성당에만 남아 있다고 한다. 성 구알테르 성당은 5개 남은 성당 중 첫 번째 성당이라고. 성당 입장료는 없지만 점심시간에는 문을 닫는 곳이었는데 간발의 차이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블로그에서 본 거창한 설명보다는 다소 평범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다만, 스테인드 글라스는 전부 십자를 지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성당 내부의 의미나 상징을 내가 자세히 잘 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참고로 구알테르는 상 프란시스쿠성당(lgreja de Sao Francisco)에 묻혀있다.
성 구알테르 성당과 마주 보고 있는 광장의 다른 족 끝에는 알베르토 삼파이오 박물관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기마랑이스 역사유적지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삼파이오 박물관은 원래 수도원이었던 곳이 대학으로도 사용되다가 여러 번의 개조작업을 거쳐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내 눈을 가장 사로잡은 건 회랑이었다.
대칭으로 늘어선 회랑은 중간에 작은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인데 굉장히 독특했다. 이 회랑은 로마네스크를 기본 양식으로 여러 가지 포르투갈 양식이 더해진 곳이기에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포르투갈 중세 건축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건축을 잘 모른다고 해도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는 기둥도 그렇고 벽마다 다양한 조각들은 예사롭지가 않다. 특히 이곳의 회랑은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모두 달랐다. 회랑의 아치는 무심한 듯 정원의 풍경을 내 앞으로 끌어다 놓고 발길을 계속 멈추게 만든다. 작정하고 준비한 선물을 무심하게 내밀며 '오다가 주웠어'라고 하듯.
박물관 내부는 2층의 공간인데 성당의 성물, 보석, 그림, 프레스코화, 직물 등 엄청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다양한 류의 보석이 유명하다고 했는데 보석보다 눈을 사로잡았던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포르투갈 아비스 왕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주앙 1세가 실제로 입었던 군복이다. 1385년 스페인 레온 카스티야 왕국의 후안 1세와 벌어진 알주바호타 전투(Aljubarrota)는 포르투갈이 재차 독립국임을 확인시켜 주는 전투로 포르투갈 역사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언급되는 전투다. 우리나라 역사로 치면 태조 이성계 때니 이방원이 입었던 갑옷 정도라고나 할까. 유물이 상당해 포르투갈 역사나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나절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박물관을 나와서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기마랑이스의 역사지구 한복판이다. 과거 기마랑이스가 번영을 누리던 시기에 중심광장이었기에 지금도 광장을 둘러싸고 구 시청사를 비롯해 주요 건축물을 비롯해 식당들이 즐비했다.
광장에는 매우 독특한 건축물이 눈에 띄는데 살라도 전투(Battle of Salado) 기념비다. 8세기 이베리아 반도에 이슬람을 몰아내기 위한 독립운동인 레콩키스타 운동이 일어났고 무어인을 완전히 몰아낸 것을 기념해서 세운 기념비다. 워낙 급하게 떠났던 포르투 여행이었던지라 그때는 이 비석의 의미조차 알지 못했지만 굉장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비석이었다. 어쩐지, 내가 받은 느낌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
포르투에서 오전 일찍 출발해 페냐 성소를 지나 이것저것 보면서 기마랑이스 역사지구에 들어오니 벌써 만 보를 넘어가고 있다. 배가 고픈 것보다 피곤이 몰려오니 다리를 좀 쉬고 싶었다. 맛집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광장에 있는 여러 식당 중에 대충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는 고을 정해 자리에 앉았다. 살짝 땀이 흐르던 찰나 시원한 포르투갈 맥주 사그레스를 한 잔 들이켜니 순식간에 피로가 눈 녹듯 녹는다. 광장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느긋한 여행자 대열에 합류한다.
자, 점심도 먹었고 쉴 만큼 쉬웠으니 다시 구경모드다. 바로 코 앞에 있는 올리베이라 성모 성당으로 들어갔다. 광장과 성당의 이름은 '올리브'라는 의미인데 원래는 이 이름이 아니었다고 한다. 리스본의 한 상인이 올리브를 가져와 심었는데 말라죽었다가 3일 뒤에 기적적으로 푸른 잎이 열매를 맺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광장의 이름과 성당의 이름을 올리베이라고 새로 지었고 지금껏 불리고 있다고 한다. 입구에 올리브 나무가 있다고 했는데 나는 왜 보지 못했을까.
삼파이오 박물관과 맞닿아 있는 성당은 입구에서도 회랑이 일부 부이기도 했다. 3세기에 수도원이 있던 자리에 성당이 세워졌고 포르투갈 고딕 양식의 끝판왕이라는 이 성당은 여러 번의 개조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처음부터 이 모든 건물이 한꺼번에 지어진 게 아니고 하나씩 증축을 하면서 덧붙여 나갔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 건축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당이라 우리나라로 치면 국보급에 지정된 성당이라고 한다. 포르투갈의 꽤 많은 성당이 이 성당을 모델로 지어졌다나.
올리베이라 광장을 나와서 도시의 가장 위쪽에 있는 기마이랑스 성으로 걷다 보면 포르투갈 도시 성벽이 나타난다.
성벽에 아로새긴 선명한 문구 하나 'aqui nasceu portugal' 이곳에서 포르투갈이 태어났다'라고 적고 있다. 포르투갈을 건국한 아폰수 1세는 첫 수도를 기마이랑스로 정했으니 이 도시가 포르투갈의 시작인 셈이다.
건국도시 성벽이라고 해서 전체가 성벽일 거로 생각했는데 성벽은 한쪽이고 옆으로 집들이 즐비해 약간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마이랑스는 도시 전체가 역사지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데 포르투갈의 중세부터 현대 건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했다. 혹자는 포르투갈의 건축 박물관이라고도 표현하고 있었다. 이 건국도시 성벽을 보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다. 중세의 성벽을 벽 삼아 옆으로 주택이 들어선 모습이 꽤나 이색적이었다. 마치 서울성곽 벽 한쪽을 내 집벽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지 않은가. 중세의 도시가 현대로 이어지는 시간의 흔적이 도시 건축에 고스란히 남았다.
건국도시 성벽을 지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기마랑이스 요새로 가는 길은 약간 오르막이다. 포르투갈 건축백과사전 한 장 한 장 넘기듯 골목을 걷다 보니 카르무 정원에 도착했다. 온통 4월의 싱그러움으로 가득 찬 완연한 봄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끝에는 포르투갈을 건국한 아폰수 엔리케 1세의 동상이 서 있다.
포르투갈은 12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독립된 나라가 아니었다. 당시 포르투갈과 스페인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 레온 카스티야 왕국의 영지 중 하나였다. 엔리케는 아폰수 6세로부터 포르투갈 백작의 지위를 받았고 그의 딸 테레사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엔리케 사망 당시 4살이었던 그의 아들 아폰수 엔리케가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으로 부터 독립을 쟁취해 내고 1143년에 포르투갈 최초의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1143년이 돼서야 비로소 '포르투갈'이란 온전한 이름으로 세계사에 등장을 시킨 아폰수 엔리케 1세. 그가 태어난 기마랑이스는 응당 건국의 첫 수도여야 했다. 그러니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엔리케 1세가 태어난 기마랑이스는 '시다드 베르수(Cidade-berco)', 요람의 도시라 불리는 것도 당연했다.
카르무 공원을 지나면 브라간사 공작 저택, 기마랑이스 성, 상 미구엘 성당이 차례로 이어진다. 기마랑이스 성을 들어가려면 티켓을 구매해야 하는데 브라간사 공작 저택입구가 티켓부스였다. 상 미구엘 성당은 무료 관람이었고 나머지 두 곳은 각각 티켓을 끊어야 하는데 둘 다 볼 수 있는 통합티켓을 있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통합티켓을 구매하고 브라간사 공작저택을 먼저 둘러봤다.
'브라간사'는 아폰수 엔리케 1세의 가문으로 가문의 자부심을 보여주기 위해 아폰수 엔리케가 15세기에 건축한 석조 건축물이다. 대통령의 여름 궁전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이 저택은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포르투갈의 흥망성쇠를 같이한 브라간사 공작의 저택은 안으로 들어서니 중정을 두고 사방이 둘러싸고 있는데 요새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한때는 군사시설로도 사용되기도 했단다. 샹들리에가 있는 연회장을 비롯해 테페스트리, 초상화, 도자기 등으로 빼곡하게 채운 방들은 브라간사 가문이 누렸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밖에서 볼 때와 달이 안으로 들어서니 상당한 규모라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았다.
중정을 둘러싼 건축은 기하학적이면서도 독특한 느낌이었다. 기념품 숍에서 브라간사 저택이 프린트된 반팔티를 팔고 있어서 기념으로 하나 구매했다.
브라간사 공작 저택을 나오면 상 미구엘 성당을 지나 기마랑이스 성으로 이어지는 동선이었다. 상 미구엘 성당은 아폰수 1세가 세례를 받은 곳으로 당시 세례를 받을 때 사용했다는 분수가 남아 있다. 무엇보다 성당 바닥에 포르투갈 건국 공신들이 묻혀 있는 곳이니 이곳 역시 포르투갈 역사에서는 중요한 곳이다.
성당은 겉에서 볼 때는 아담해 보였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세로로 긴 구조였다. 맨 안쪽에 돌로 만든 제단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얇은 세로 벽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니 십자가 역할을 하고 있다. 건축가 이타미 준이나 안도 다다오도 어쩌면 이런 것에서 영감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오늘의 마지막 여정인 기마랑이스 성에 도착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중세 성곽의 모습이다. 무어인과 노르만족의 침입으로부터 수도원과 도시를 지키기 위해 지어졌다고 하는데 들어가는 입구부터 '철옹성'이다. 개미새끼 한 마디의 침입도 허락지 않겠다는 결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고나 할까.
이곳에서 아폰수 엔리케 1세가 탄생했다고 하는데 도시 전체를 방어하기에는 생각보다 성이 좀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요새는 이베리아 반도를 침입하는 수많은 세력으로부터 산타마리아수도원(Mosteiro de Santa Maria)을 보호하기 위해 포르투갈 공국 건국 이전인 10세기 후반에 세워진 요새였다. 이후 이곳에 거주하는 수많은 귀족들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여러 차례 수리한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외관의 뾰족한 타워는 어느 영화에 한 번쯤 나왔을 법한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이겠지.
안 가본 도시 하나쯤은 보고 와야 재탕인 포르투 여행의 의미를 더할 것 같아서 찾아간 도시 기마이랑스. 포르투를 여행한다면 근교여행으로 하루 정도는 포르투갈이 시작된 곳을 다녀와도 좋겠다.
+ 다음 이야기 : 포트 와이너리 여행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1장은 매거진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go-bey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