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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해경 Dec 12. 2023

영국 현지인들과 함께 도버해협 트레킹[런던트레킹]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14 도버해협 트레킹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14 영국 현지인과 함께 도버해협 트레킹 


+  다양한 활동을 해 볼 수 있는 앱, 미트 업(Meet up)

런던에 온 지 두 달 정도가 지나자 어느 정도 런던 생활에 익숙해졌다. 비가 간간이 내리는 런던의 9월 중순의 날씨는 산티아고를 걸었을 때와 너무 닮았다. 10년 전 이맘때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그래서인지 한동안은 가을로 접어들면 산티아고 순례길이 그리워졌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희미해졌고 10년이 지나고 나니 완전히 잊혔다. 


비 때문이었을까. 문득 런던에서도 트레킹을 하고 싶어 졌지만 트레킹 코스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럴 땐 미트 업(Meet Up) 앱이 만능이다. 전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는데 몰타에서 외국인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된 앱이다. 미트 앱을 확인하니 런던 근교 트레킹을 하는 모임이 몇 개가 있었다. 그중 눈에 '도버(Dover)'란 두 글자가 눈에 띄었다. 영국 도버와 프랑스 칼레를 잇는 대서양 도버해협은 영국에서 프랑스까지 불과 34km로 최단거리다. 지리적인 이점은 역사적으로 볼 때 충돌이 필수적이라 이 일대는 숱한 전쟁과 역사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내게 도버해협이 각인된 건, 1982년 수영선수 조오련이 도버해협을 횡단했다는 뉴스 때문이었다. '횡단'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꼬꼬마였던 나는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도버해협'을 궁금해했지만 이내 잊혔다. 그렇게 까맣게 잊어버렸던 도버해협이 홀연히 나타났다. 


주최자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유혹했다. 

'A most stunning & beautiful 10 mile coastal walk by the iconic White Cliffs of Dover!'

'상징적인 도버의 하얀 절벽을 따라 가장 아름답고 굉장히 멋진 10마일의 해안 산책로!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아직 원어민과 긴 시간 대화를 해본 적이 없는 상태였고 무엇보다 10마일, 16km에 달하는 거리는 최근에 걸어본 적이 없어 체력 걱정도 됐다. 


하지만 이 트레킹이 아니라면 혼자 도버해협을 간다는 건 언감생심이고 도버해협 트레킹은 더 힘든 일이니 '에라 모르겠다 어찌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참가 신청서 버튼을 눌렀다. 성격상 과감한 면이 있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름 돌다리를 다 두드려본 후 판단이 설 경우에 한해서인데 앞뒤 크게 재지 않고 내가 이렇게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사람이었나 싶어 뒤늦게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만큼 '도버해협'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고나 할까. 


세인트판크라스역의 도버해협으로 가는 열차


+ 도버에서 딜까지 16km 트레킹 

약속장소는 영국과 프랑스를 왕래하는 유로스타의 종점역인 세인트판크라스 역이었다. 처음 가본 세인트 판크라스 역은 지하철의 경우 킹스크로스역과 함께 사용하는데 기차역은 다른 건물이었고 국제선이 운영하는 곳이라 엄청 컸다. 역사 안에서도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일행을 만났다. 


어떤 사람이 트레킹에 참여를 할까 너무 궁금했다. 런던은 세계 각국의 인종이 다 모인다는 말을 증명하듯 5 대륙 인종이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이한 건 런던에 살고 있지만 벨기에, 오스트리아, 스페인, 독일 등등 국적이 영국이 아닌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어떤 이는 태어난 곳보다 런던에서 산 시간이 많다고도 했다. 인도, 파키스탄, 중국 등 몇몇 아시안의 경우 영어가 너무 유창하다 싶었는데 부모나 조부모대부터 런던을 이주한 사람들로 런던 태생의 영국사람이었다. 


대부분 런던 출생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추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래도 그들은 모두 런더너였다. 어쩌면 내가, 한국 사람이 가진 고정관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한국인인 내가 혼자 트레킹에 참여한 것이 신기할 것도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몰타에 있을 때는 한국인인 내가 혼자 현지인들 사이에 트레킹에 참여하니 정말 신기했었다.) 

세인트판크라스 - 딜까지 왕복 기차표 


기차를 타고 1시간 남짓 달려 도버해협 역에 도착했다. 런던을 출발할 때는 날씨가 좋았는데 도버에 도착하니 날이 우중충하고 이내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비가 자주 오는 런던이라 몰타에서 올 때 방수재킷과 방수가 되는 트레킹화를 챙기면서도 너무 오버인가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안 챙겼으면 큰 일 날뻔했다. 


도버역을 나서면서 바로 트레킹이 시작됐다. 30분 정도 걸었을까 어느새 해안가에 도착했다. 도버는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작은 동네였다. 

도버역에서 도버해협으로 가는 길.


얼마 걷지 않아 해안가에 도착했다. 바다보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건 하얀 절벽이었다. 하얀 절벽 아래 지어진 집들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골목 끝에 다다르니 도버해협 절벽으로 올라가는 안내판이 보인다. 


혼자라면 절대 못 찾아오겠다 싶었다. 

도버해협 화이트 절벽을 향해


화이트 절벽으로 올라서니 도버해협과 항구가 발밑으로 펼쳐진다. 


도버해협은 지리적 요충지라 유럽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한 번씩 등장했기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곳이었고 약간의 환상이 있었다. 그랬던 곳에 직접 서고 보니 느낌이 묘했다.  


부산 신항보다 훨씬 작고 한적했다. 프랑스에서 출발한 페리가 영국 도버해협 안으로 천천히 진입한다.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가기 위해 페리에 차를 싣기 위해 기다리는 행렬도 간간이 보인다. 유로스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페리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도버항 바다 너머 프랑스 칼레까지 약 36km이니 날이 좋다면 프랑스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인데 날씨가 흐린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도책을 보면서 늘 상상했던 곳은 모든 것이 너무 평범하고 평범했지만 이곳에 서 있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상념에 계속 빠져있기엔 길은 이제 시작이고 가야 할 길이 너무 많이 남았다.  

도버해협 항구 
도버 항 바다 너머는 프랑스 칼레다. 
도버 성 


도버해협 트레킹은 해변을 따라 걷는다는 것만 생각했기에 이 지역이 어떤 곳인지 몰랐다. 완만한 오르막을 올라서니 드넓은 초원길이 펼쳐져있다. 등 뒤로 도버항이 점차로 멀어진다. 


도버해협을 벗어나자마자 내리던 비는 어느새 빗방울이 굵어진다. 거친 바닷바람이 들판에도 사정없이 들이치니 우산을 펼 수도 없고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점점 젖어간다. 비를 맞고 걷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산티아고 이후로 처음인지도 모르겠다.  


특유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비가 세차게 내리다가 다시 그치고 그러다 다시 소나기를 퍼부어댄다. 정말 종잡을 수없는 바다 날씨다. 

비바람이 오락가락하던 도버해협 


시간은 어느새 정오가 됐다. 절벽에서 작은 어촌마을로 내려왔다. 가이드는 이곳에서 점심도 먹고 비를 맞은 몸도 좀 녹이고 쉬어가자고 했다. 여름 휴양철에는 피서객들로 북적였을 텐데 비도 오는 날씨에 휑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웬걸. 그리 크지 않은 카페에는 몇몇 여행객도 보이지만 대부분은 휴일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동네 주민들이 카페에 옹기종기 모여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뒤늦게  카페에 들어간 탓에 자리가 없어 2층 복도 창가에 의자만 놓인 곳에 앉았다.  뜨거운 핫초코와 샌드위치로 추위와 배고픔을 달랬다. 대략 40분 남짓 쉬었을까 비가 잠시 소강상태인 틈을 타 다시 길을 나섰다. 목적지인 딜까지 거리를 확인하니 아직 반이나 더 남았는데 비로 인해 생각보다 지체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비에 젖은 몸을 잠시 쉬기 위해 작은 어촌 마을 카페에서 쉬어간다. 


지리에 익숙한 리더가 들머리를 잡고 다시 걷기가 시작됐다.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능선에 올라섰다. 흰 절벽이 예사롭지 않았다 싶긴 했었는데 능선에 올라서 뒤를 돌아보니 신비로운 흰색 벽이 홀연히 나타나는 느낌이다. 내가 걸어온 길이 흰 절벽 위였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다들 감탄을 자아내며 사진에 담느라 분주하다. 


도버해협의 흰색 절벽은 우리에게 세븐시스터즈로 알려진 이스터 본(Eastbourne) 일대의 흰색 절벽과 같은 초코 성분이다. 초크 성분은 유공충이라는 껍데기가 탄산칼슘으로 되어 있는 바다 생물의 화석이다. 런던 남부지역 해안가 절벽 일대는 오래전 백악기 때부터 죽은 유공충들의 껍데기가 바닷속에 그대로 퇴적되었던 것이 지층이 융기하면서 도버해협도, 세븐시스터즈도 초코 성분의 하얀색 절벽이 된 것이었다. 


도버해협 하얀 절벽은 해안선을 따라 약 16km 뻗어 있는데 이런 지형적인 이점 덕분에 적들이 상륙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날씨가 맑다면  프랑스 칼레에서 영국 도버해협 쪽으로 바라보면 흰색으로 병풍이 두른 듯 장관일 것 같았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 회색의 세상에 절벽만 유일하게 하얗게 빛나는 도버의 흰색 절벽은 그래서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다.  

도버의 흰색 절벽 


비를 맞고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10km 지점을 통과한다. 처음에 출발할 때는 가랑비였기에 옆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서로 사진도 찍어 주고 했는데 걷는 시간이 늘어나니 다들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몇 시간째 내리는 비를 맞고 걸었더니 어느새 속옷까지 빗물이 침범하기 시작했다. 가랑비로 폭풍우로 날씨가 종잡을 수 없으니 들리는 건 빗소리와 발소리뿐. 


모처럼 하루종일 비를 맞으며 걸도 있자니 산티아고 순례길의 추억이 끄달려 나온다. 산티아고의 거의 마지막은 갈리시아 지방을 걷게 된다. 갈리시아 지방은 초겨울로 접어들면 우기가 시작되는데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까지 남은 열흘 동안 하루도 비가 오지 않은 날이 없었다.  체력적으로도 가장 지친 상태인데 날씨마저 안 좋으니 매일매일 자신과 사투를 벌이는 하루하루였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전혀 다른 곳인데  산티아고 순례길로 나를 데려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빗물이 속옷까지 파고드는데도 싫지 않았다. 산티아고를 걷고 있을 때는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고 치를 떨었는데 왜 힘든 생각 대신 좋았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걷기가 부리는 마술이지 싶다. 

산타이고 순레길 같았던 길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딜(Deal) 해변이 나타났다. 딜에 도착할 즈음 비는 그쳤다. 폭풍우 바람이 산들바람으로 바뀐 덕분에 계속 걷고 있으니 젖었던 옷들이 체온과 바람에 의해 마르기 시작한다.  비가 와서 체력적인 소모는 많았지만 들판, 오솔길 등 흙을 밟는 길이어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았다. 


들판을 걷다가 해변을 따라 걸으니 또 색다른 느낌이다. 


딜(Deal)은 북해와 영국 해협이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한때는 항구도시로 명성을 떨치던 곳이었단다. 17~18세기에는 해적을 방어하기 위해 중요한 항구도시였으나 지금은 한적하고 아름다운 해변도시로 변모했다. 날씨가 맑으면 이곳에서도 바다 건너 40km 남짓 떨어져 있는 프랑스 해안 마을이 육안으로 보인다고 한다.  

한적하고 아름다운 해변도시 딜 


딜은 독특한 볼거리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하나는 우리가 걸었던 흰색 절병, 화이트 클리프스(White Cliffs of Dover)고 또 하나는 딜 성(Deal castle)이다. 헨리 8세가 지은 이 성은 주변을  보호하고 국가 방어를 위해 지어졌는데 성을 위에서 보면 장미꽃 모양이라 굉장히 독특하다고 한다.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걸어면서 보니 둥근 모양의 구조물이 여러 개가 붙어 있는 것이 남달라 보이기는 했다. 

한때 해적의 기지였던 딜은 영국 해안 방어에 굉장히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부두에서 도심 안으로 걷는다.  고풍스러운 골목을 지나고 도로를 몇 개 지나니 딜 기차역이 보인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걷기 시작한 지 약 7시간 만에 총 10마일, 대략 16km를 걸었다. 정말 오랜만에 긴 코스를 걸었기에 출발할 때 체력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런던을 떠날 때와 달리 줄곧 비가 내리고 어느 지점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기도 해서 트레킹 하기에 쉬운 날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릴 적 지도에서나 보았던 도버해협을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궂은 날씨였지만 꿈같은 하루였다. 혼자가 아니고 함께였기에 가능했던 트레킹이다.  


영국은 다양한 트레킹 코스를 가진 나라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걸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겁을 내고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같은 멋진 경험은 하지 못했으리라. 


런던에서 트레킹은 이날 이후로 계속 이어졌다. 



+ 다음 이야기 :  런던에서 마주한 엘리자베스 여왕 서거 시간이 날수록 영어가 어려워진다. [런던 어학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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