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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해경 Dec 14. 2023

런던에서 마주한 엘리자베스 여왕 서거 [런던라이프]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15 엘리자베스 여왕 서거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15 런던에서 직접 본 엘리자베스 여왕 서거 



+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서거(Queen Elizabeth II 1926-2022) 


그런 날은 갑자기 찾아온다. 적어도 대중에게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건강이 안 좋다는 소식이 종종 뉴스에 나오기는 했지만 보리스 총리 사임 후 9월 6일 리즈 트러스를 신임총리로 임명을 위해 벨모럴 성에서 만나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적어도 대중들은 이틀 뒤인 9월 8일에 사망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다들 영상이 아닌 사진만 나온 거로 봐서는 '건강이 꽤 안 좋은가보다'라고 짐작은 했으나 사망소식을 접할 줄은 몰랐다. 


그러다, 굉장히 호기심을 갖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동안 시끄러웠던 보리스 총리가 사임을 하고 새로운 총리로 리즈 트러스가 선출됐는데 여왕에게 신임을 못 받으면 총리직 수행이 순조롭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어 이해가 잘 안 됐다. 이유인즉슨,  총리가 선출로 뽑혔다고 하더라도 영국 사람들은 관례상 최종적으로는 여왕이 총리를 신임하는 공식행사가 있어야만 총리가 됐음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했다. 


통상은 버킹엄에서 총리 신임 행사가 이뤄지는데 여왕이 건강을 이유로 벨모럴 성에서 계속 머물고 있어서 새 총리가 신임장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가 한동안 이슈였다. 이후 벨모럴 성에서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를 임명하는 업무를 진행했다는 것이 뉴스로 보도될 때만 해도 버킹엄으로 오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긴 하나 보다라고 여기는 분위기였지만 연이어 서거 소식을 들을 줄 몰랐다. 외국인인 나도 충격인데 런던 사람들도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참고로 4개월 남짓 영국에 머무는 동안 여왕이 서거하고 총리가 3번이나 바뀌는 정치사의 현장을 본의 아니게 경험하게 됐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잠들어 있는 윈저성 
조문객들로 가득 찼었던 윈저 성 앞 100m가 넘는  퀸 빅토리아스 워크는 시민들의 산책로로 사랑받는 곳이다. 


+ 런던이 이렇게 빠른 도시였나? 

정오에 여왕이 위독하다는 속보가 전해지고 오후 6시 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런던은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됐다. 뉴스에서 사망소식이 전해지고 채 1시간이 지나지 않아 모든 버스 정류장에는 여왕의 추모 사진이 걸렸다.  bbc는 하루 종일 특별방송을 편성했고 서거 다음 날인 금요일은 모든 공공기관, 은행 등을 비롯해 큰 상점들은 대부분은 임시휴업이 결정됐다. 런던의 대표하는 건물의 조명은 평소와 달리 영국 황실을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조명이 바뀌었다.  여왕의 장례를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공공기관을 비롯해 모든 시스템이 일사불란하면서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에서 살면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느려터졌다고 느낄 수밖에 없기에 고작 2개월 머문 런던이지만 대략 런던이 어떤 곳인지는 충분히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랬던 런던인데 런던이 이렇게 발 빠르게 대처가 가능한 나라였나 싶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런  대처가 영국에서는 워낙 이례적인 일이라 외신들도 주목했고 나중에 보도되는 뉴스를 보니 일명 영국 왕실은 유니콘 작전(Operation Unicorn)으로 명명된 ‘여왕 서거 대응 계획’에 따라 D-day에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수개월에 걸쳐 시뮬레이션을 했다는 게 전해졌다. 

서거 후 채 1시간이 걸리지 않아 버스 정류장에는 여왕의 추모사진이 걸렸다. 
한국 영사관에도 조기가 게양됐다. 
타워브릿지, 더 샤드, 런던 아이 등등 런던 모든 랜드마크에는 보라색 조명이 붉을 밝혔다. 
런던 지하철 
엘리자베스 여왕 장례식 기간 동안 구글도 추모 모드 


+ 버킹엄 궁전으로 향하다. 


여왕의 서거 소식 후 8월에 브라질로 돌아간 친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여왕 서거 후 런던과 버킹엄 궁전 분위기를 궁금해했다. 나는 7월 중순에 런던으로  왔기 때문에 6월에 있었던 영국 여왕의 즉위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래니텀 주빌리' 행사는 뉴스로만 접하고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 행사에 참석했다는 그녀는 런던 어학연수 중 잊지 못할 이벤트라고 얘기하곤 했는데 여왕이 돌아가셔서 너무 슬프다고 덧붙인다. 브라질은 영연방 국가도 아닌데 그녀가 이렇게까지 슬퍼할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전 세계인으로 사랑받는 존재였다는 걸 새삼스레 느끼게 했다.  


런던에 온 지 두 달이 넘었지만 런던을 오면 무조건 간다는 버킹엄 궁전과 궁전 교대식은 가보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왕조 문화가 없기도 하거니와 로열패밀리에 대해 별 느낌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런던을 떠나기 전에는 가보긴 해야겠다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여왕의 서거로 버킹엄 궁전을 찾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마침 어학원도 임시 휴무였기에 오후에 버킹엄으로 향했다. 공식적으로 여왕의 유해는 13일에 공군기 편으로 런던으로 올 예정임에도  버킹엄 궁전 앞은 추모를 위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궁전 창살에는 수많은 헌화와 함께 여왕을 기리는 사진, 편지 등이 즐비했다. 이곳에 꽃을 매달기 위해서도 대략은 1시간 넘게 줄을 서야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여왕서거를 담은 신문 특별판을 기념으로 구매 후 버킹엄을 배경으로 신문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버킹엄 궁전 
위전 준비로 분주한 버킹엄 
시민들의 추모 
분주한 취재진들 
엘리자베스 서거 특별 호외판 신문들 


+ 웨스터 민스터 사원으로 향하다. 15일~19일 웨스터민스터 홀에서 일반인 조문 시작 


여왕의 서거 후 일주일 뒤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일반인 조문이 시작됐다. 유튜브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조문행렬 등을 실시간으로 중계가 됐다. 또한 지금부터 줄을 설 경우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현재 줄은 어디까지 늘어서 있는지 등도 계속 안내가 되고 있었다.  


 애초에 수십 시간씩 걸려 조문행렬에 동참할 생각은 없었지만  역사적인 현장의 분위기를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마침 런던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사를 했고 살고 있는 집에서 웨스터민스터 사원은 버스로 2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기에 잠시 짬을 내어 웨스터민스터 사원으로 향했다.  


웨스터민스터 사원 앞 국기게양대에는 모든 영연방 국가의 국기가 걸렸고 일대는 교통이 다 통제가 됐다. 웨스트 민스트 사원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각국 정상들의 조문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영연방 국가의 국기들이 늘어선 웨스터민스터 사원
엄청난 사람들로 가득한 웨스트민스터 사원 일대 


각국 정상의 조문을 기다리고 있는 중  
역시나 분주한 취재진들 
평소보다 더 삼엄했던 다우닝가 10번지 


일반인의 조문 행렬은 국회의사당을 지나 템즈강을 따라 런던 아이를 지나고 타워브리지 너머까지 엄청나게 긴 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길목마다 동선을 안내한 표지판도 여럿이었다. 지하철에서 조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조문하기까지 16시간 정도 걸렸다고 했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유해를 볼 수 있었다고 했는데 일반인에게 유해가 공개된 건 1965년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장례 이후 처음이란다. 


조문 행렬을 보고 있자니 좀 특이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누가 봐도 공항에서 이곳으로 곧장 왔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여행 캐리어를 든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실제로 그런 사람 중 한 명에게 물었더니 여왕 서거 소식을 듣자마자 조문을 위해 회사에 휴가를 내고 바로 달려왔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런던을 여행 중인 사람들도 조문행렬에 대거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영국 사람의 경우에는 확실히 젊은 세대보다는 확실히 연배가 있는 분들이 훨씬 더 많았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느낌상으로든 영국 사람보다 영국이 아닌 사람이 더 많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생에 단 한 번의 조문만 가능한 여왕의 서거이니 내 나라의 여왕이 아니어도 스무몇 시간 즈음 줄을 서는 건 그들에겐 기꺼운 일이었다. 어찌 보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단순히 런던만의 여왕이 아니라 전 세계인이 사랑했던 여왕이었다는 걸 조문행렬이 말해주고 있었다. 

웨스터민스터 조문을 하기 위해 20시간이나 줄을 서기도 했다고. 


+ 그린 파크에 놓인 수많은 꽃들 


버킹엄 궁전에 너무 많은 꽃이 놓이자 정부에서는 헌화장소를 그린파크로 옮겼다. 공공장소에 영결식장을 마련해 국화꽃을 헌화하는 것과 달리 영국은 형형색색 다양한 꽃다발을 헌화했다. 꽃다발 외에도 편지, 사진, 직접 그린 그림, 특별한 추억 등 여왕을 기리고 기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았다. 


내용도 모두 제각각지만 대체로 여왕이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보여준 것에 대한 찬사였다. 어떤 것은 사진만으로도 코끝이 찡해지는 것들도 있었다. 여왕에 대해 특별한 감정이 없음에도 꽃과 함께 다양한 물건들이 놓아진 것을 찬찬히 보고 있자니 가슴이 한편이 찡하다. 대부분 같은 마음인 건지 진지한 마음으로 천천히 사연들을 보면서 여왕에 대한 추억에 잠기는 시민들이었다. 


상당히 넓은 그린파크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수많은 꽃들로 공원이 가득 메워지는 모습은 매우 특별하면서도 경건했다. 이렇게 헌화한 꽃들은 모두 모아서 공원의 퇴비로 다시 사용될 예정이라고 하니 그 또한 뜻깊은 일이겠다. 

그린파크에는 여왕의 추모를 위한 시민들의 헌화공간이 마련됐다.
반가운 한글 
가슴 한편이 아련해지는 추모의 마음들


+ 장례식 당일 런던 시내 

엘리자베스 여왕의 공식 장례식이 열렸던 19일은 영국에서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다. 여왕의 영결식 장면은 웨스터민스터사원과 하이드파크 등에서 큰 화면으로 생중계가 될 예정이었다. 지인은 역사적인 순간이니 현장에서 꼭 보고 싶다고 새벽부터 현장에 있겠다고 했다. 나는 계속 감기 몸살 기운이 있어 생중계가 얼추 끝나는 시간에 런던 시내에서 만나자고 했다. 영결이 진행되는 시간 동네 성당에서는 일제히 종이 한참 동안 울렸다.


버킹엄 궁전으로 이어지는 더몰(The mall)과 그 일대의 런던의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 트라팔가광장, 피가딜리서커스역, 레스터 스퀘어역 일대는 모두 차량이 통제됐다. 차량만 통제된 것이 아니라 길마저도 통제되는 곳이 많아서 빙빙 돌아가야 해서  런던 시내를 엄청 걸어야 했다. 

주요 메인도로는 모두 통제가 됐다. 
장례식 당일 더몰 


교통이 혼잡하기로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런던 시내에 차가 없는 날이 일 년에 한 번이 있을까 말까 할 텐데 오늘이 그날이었다. 평소에는 차가 다니던 도로에는 사람들이 전부 쏟아져 나온 느낌이었다. 도로가 통제되는 곳이 많으니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돌아야 했고 본의 아니게 '걸어서 런던 시내 한 바퀴' 콘셉트의 여행이 됐다. 다리는 몹시 아팠지만 이때가 아니면 도저히 해볼 수 없는 경험이다 싶으니 참을만했다. 덕분에 그동안은 많이 다니지 않았기에 아는 곳만 알았던 런던 시내 지리도 완전 다 파악했다.  

장례식 당일 차량이 통제된 런던 시내 풍경 
시민들의 반응을 담고 있는 취재진들 
그 와중에 반가운 몰타대사관과  브랜드 숍에 걸린 손흥민. 


런던 시내 번화가인데도 다른 날과 달리 분위기는 상당히 차분했다. 늘 시끌벅적한 트라팔가 광장마저도. 한 거리의 아티스트는 트라팔가 광장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습과 영국여왕 70주년 행사에 패딩턴과 여왕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장면을 남겼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있었다. 

트라팔가 광장 바닥에 추모의 그림이 


하루종일 런던 시내를 다니고 나니 다리가 너무 아파 런던 시내의 해리포터 극장 옆 캠브리지 펍으로 들어갔다. 빈자리 하나 없이 사람들로 가득한데 모두 숙연한 분위기에서 차분하게 맥주를 마시며 여왕의 장례식 재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평소라면 시끌벅적 떠들썩할 텐데 누구 하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 이후 이날처럼 조용했던 런던의 펍은 경험하지 못했다. 

영국 여왕 장례식 재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사람들 


+ 이제 찰스 황태자가 아니라 찰스 왕이다. 

       

권력은 공백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엘리자베스 여왕이 서거한 주말에 스톤헨지로 여행을 다녀왔다. 무슨 행사가 있다고 군인들이 잔뜩 몰려있었는데 축포를 쏘는 행사라고 했다. 황태자였던 찰스가 여왕의 서거로 왕으로 즉위했는데 기념축포를 스톤헨지에서도 쏠 예정이라고 했다. 


여왕의 생전 인터뷰에 '왕위 계승 없이 죽기 전까지 여왕직을 유지하겠다'는 이야기가 보도되자 런더너들은 찰스가 왕위 계승 전에 여왕보다 먼저 사망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농담 삼아한다고 했다. 들은 얘기로는 찰스가 개인적으로 인기도 없지만 영국은 왕보다 여왕일 때 더 번성했기에 왕의 귀환을 반기지 않는다고 했다. 찰스가 왕위를 계승할 경우 아들, 손자까지 줄줄이 남자라 향후 백 년 이상 여왕이 즉위할 가능성이 없어 엘리자베스 여왕이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지 불과 일주일이 채 안 됐는데 여왕이 서거했다니 참 인생무상이다 싶다. 


가끔 어학원에서도 로열 패밀리에 관해 토론을 하기도 했었다. 성향의 차이겠지만 다소 젊은 선생님들의 경우 대체로 로열패밀리에 대해 큰 관심도 없고 그다지 좋아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유는 다 짐작할 테고. 일례로 로열패밀리 행사 있을 때 엄청난 인파가 모이지만 정작 현장에 있는 사람 중 런던 사람보다 관광객이나 연방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더 많다는 의견이었다. 실제로 내가 여왕의 장례식장에서 본모습도 그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 영국 왕실이, 찰스 왕의 미래가 어떨지.... 를 생각하기엔 우리나라가 더 문제라는 생각이 드니 그 참. 

스톤헨지에서 찰스 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축포를 쏘고 있다. 


+ 다음 이야기 : 영어가 갈수록 어렵다. (어퍼인터미디어트로 레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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