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작가 정해경 Dec 08. 2023

런던 도서관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런던어학연수]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13 런던에서 도서관 이용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13 [런던 도서관 이용기] 도서관 이용하다가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 너무 어두운 실내조명 

런던이 좋긴 했지만 가장 불편한 거 한 개만 들라고 하면 1초의 고민 없이 '실내조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내조명이 어찌나 어두운지 그나마 낮에는 견딜 만 한데 해가 지고 나며 너무 어두운 조명 때문에 집중해서 책을 보기가 힘들었다. 한때는 우리나라도 백열등이 대부분이었으나 LED가 백열등보다 룩스도 높고 오래 사용하고 전기료도 덜 나간다고 해서 LED로 대대적으로 교체를 했다. 그런데 런던은 여전히 백열등을 사용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책을 볼 때 독서등이 꼭 필요한데 어학연수 짐으로 독서등까지 챙기기에는 좀 과하다 싶어 챙기질 않았다. 막상 생활을 해보니 몰타도 실내조명이 어둡긴 해도 책을 보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는데 런던은 독서등이 없으면 10분 이상 책을 보기가 힘들었다. 처음에는 참았으나 결국 한 달 정도 지나고 난 뒤 도저히 안 돼서 영국사랑에서 중고로 독서등을 구매했다.  


몰타에서는 정규수업 밖에 듣지 않았고 그마저도 낮은 레벨이라 따로 예습, 복습을 하지 않아도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런던에서는 인터미디어트 레벨부터 시작했는데 정규 수업 3시간 외에 인텐시브 1시간 30분 수업까지 하루에 4시간 30분의 수업인데 공부해야 할 분량이 상당했다. 


오후에 어학원 수업이 있는 경우에는 학원 갈 때까지 집에서 공부를 했다. 오전에 수업인 경우 어학원을 마치면 오후 2시 30분이었는데 6시까지는 어학원 안의 도서관이나 휴게실에서 공부를 했다. 하루에 3시간 정도의 공부로는 수업을 따라가기가 벅찰 지경이었고 예습을 하지 않으면 복습만으로 그날 배운 내용을 다 소화하기가 어려웠다. 


고민 끝에 바로 집으로 가는 대신 런던의 도서관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런던에서는 두 곳의 도서관을 이용했는데 하나는 EC London 어학원 근처에 있던 '영국도서관'이고 또 하나는 집 근처였던 '사우스워크 헤리티지 센터 앤드 월워스 도서관'이었다. 

어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면 어학원이 문을 닫는 오후 6시까지는 어학원에서 공부 
집에서는 조명이 너무 어두워 결국에는  스탠드 조명을 사고야 말았다.   


+ 영국 도서관(The British Library)  

내가 다니고 있는 EC London 근처에 런던에서 가장 큰 국립도서관인 '영국 도서관'이 있었다. 평일은 저녁 8시까지 주말은 5시까지 개방을 하니 공부를 위해 집보다는 도서관을 이용하기로 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는 편인데 런던에서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할 줄은 몰랐다. 


영국 도서관은 킹스크로스 역과 유스턴 역 사이 대로인 유스턴 로드에 있는데 킹스크로스 역에서 가까웠다.  어학원이 유스턴 역 근처라 (현재는 엔젤 역에 있다) 어학원 수업 마치고 런던 시내 구경하면서 슬슬 걸어가도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 영국 도서관은 사방에서 들어갈 수 있는 열린 구조라 한두 곳을 제외하면 딱히 출입문이 없었다. 처음에는 들어가는 곳을 찾지 못해 좀 헤맸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드넓은  야외 카페가 있는 독특한 구조였다. 

양 사방 대로와 접하고 있는 런던 도서관은 여러 곳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도서관 마당에서 붉은 벽돌의 건물 뒤로 고풍스러운 세인트판크라스 역이 보이는 풍경은 처음에는 몹시 낯설었다. 중세풍의 궁전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으니 너무 도회적인 영국도서관이 다소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자주 보게 되니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도서관을 들어서면 다른 시공간으로 초대되는 느낌이 참 좋았다. 가끔은 실내에서 공부하다가 머리가 잘 안 돌아갈 때면 한 번씩 밖으로 나와 성을 (적어도 나에겐 지하철 역보다 성의 느낌이 강했다.) 쳐다보면서 커피 한 잔으로 머리를 식히기도 했다. 


1998년에 문을 연 영국도서관은 원래는 영국박물관(Brithsh Museum)에  있다가 소장 자료가 계속 늘어나면서 지금의 자리에 새 건물을 짓고 이전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유행했던 건축 스타일인 붉은 벽돌을 이용해 모던하게 지었는데 주변 건물과 조화를 생각했단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 중 하나로 장서 규모도 규모지만 국립도서관답게 중요한 소장품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비틀스 자필 악보, 가장 오래된 신약 성경,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라는 대헌장 문서 등인데 도서관 1층 갤러리에 보관되어 있다. 이 소장품을 보기 위해 일부러 도서관을 찾는 사람도 있다고. 일반인도 볼 수 있냐고? 물론이다. 어학원에서도 이곳에서 현장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우리 반의 경우 사설 미술관 관람 수업을 했는데 다른 반에서는 영국도서관 갤러리 관람을 했다. 도서관에서 매번 공부하느라 갤러리 관람은 다음에, 다음에 이러면서 미뤘는데 결국에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결국에는 기념으로 에코백 하나만 구매하고 뭔가 허전하다 싶었는데 런던을 떠나고 나서야 갤러리 관람을 하지 않았던 것이 뒤늦게 생각이 났으니 이거 원. 

도서관 뒤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건물은 유로스타 종점인 세인트 판크라스 역이다. 


+ 스마트폰 조심해, 누가 훔쳐갈 수도 있어. 


영국도서관은 입구에서 시큐리티가 가방을 열어서 혹시라도 위험한 물건이 없는지 확인을 한 다음에야 출입이 가능하다. 도서관 출입을 위해서는 매번 가방 검사를 받아야 했다. 처음에 도서관을 갔을 때 어떻게 이용하는지 몰라 어리버리하게 있으니 시큐리티 가드가 가방 검사를 하면서 이것저것 말을 건넨다. 


한국에서 왔고 어학연수 중인데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어서 도서관에 왔다고 하니 시큐리티 특유의 딱딱한 표정이 금세 누그러진다. 덩치는 산만한 아저씨가(그래봤자 나보다 나이는 어리겠지만) 싱긋싱긋 웃으며 도서관 이용에 대해 이것저것 굉장히 친절하게 알려주니 살짝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우리 동네 도서관인 양 순식간에 마음이 편해졌다. 


이후 도서관을 출입할 때 그 직원이 있을 때는 얼굴을 알아서인지 내가 가방 열려고 하면 

"됐어. 가방 안 열어도 돼. 그냥 들어가."라고 쿨하게 말했다. 다른 직원이 왜 저 사람은 가방 검사 안 하냐고 간혹 묻기도 했는데 그러면 "응, 내가 아는 사람이야. 괜찮아." 이러면서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다. 영국 사람들은 차갑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이분도 그렇고 의외로 유머러스한 런더너가 많았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서면 층고가 높은 열린 공간의 로비가 나온다. 열람실은 주로 2층에 배치가 되어 있는데 넓은 공간에 비해 좌석수는 많지 않았다. 어학원이 끝나고 공부를 좀 길게 하고 싶어서 도서관을 바로 가거나 주말에 정오쯤에 도서관에 오면 대부분 좌석이 다 차서 자리가 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주말 오픈시간에 맞춰 가보니 대략 20분 정도 지나니 좌석은 이내 만석이 될 정도였다. 


영국도서관 열람좌석이 고작 이 정도인가  싶지만 외부에 노출된 열람실은 빙산의 일각이고 내부에 수많은 열람좌석이 따로 있었다. 다만, 그곳은 따로 학생이라는 걸 등록하고 별도의 출입증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했다. 어학원 학생증으로도 출입증을 만들 수 있었는데 3개월 정도만 체류할 생각이라 외부의  열람실만으로도 충분했기에 굳이 만들지 않았다. 

영국 도서관 


나는 안쪽에 앉는 걸 좀 답답해하는 편이라 좌석 가장 바깥쪽, 그러니까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면에 있는 곳을 선택했다. 책상 위에 차례로 노트북, 교재와 노트, 필통, 휴대폰 등을 올려놓고 한참 공부에 집중하려는 찰나, 


"스마트폰 조심해" 


도서관 자원봉사자가 내 옆으로 지나가다가 멈춰 서더니 다른 사람들도 다 들어라는 듯 큰 소리로 말을 걸어서 화들짝 놀랬다. 느닷없이  스마트폰을 조심하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그녀는 책상 가장자리,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쪽에 놓아둔 스마트폰을 가리킨다. 스마트 폰을 가장자리에 놔두면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스마트 폰을 슥- 집어 갈 수 있다며 스마트 폰을 집어넣거나 아니면 책상 안쪽으로 옮기라는 주의였다. 내가 스마트 폰을 책상 안쪽으로 옮기자 그녀는 다른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런 그녀의 태도가 다소 의외였기에 내 시선은 자연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열람실 좌석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혹여나 절도 같은 불상사가 일어날 걸 대비해 매의 눈으로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머리가 띵해졌다. 이 멋진 국립도서관에 소지품을 주의시키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도, 소지품을 그대로 두고 자리를 비운 것도 아니고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스마트폰을 놓아둔 것도 훔쳐갈 수 있다는 것도, 모두가 믿기 힘든 일이었다. 누군가가 런던 도서관에서 이런 일을 경험했다고 말한다면 당장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게 말이 돼?" 


내가 하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으니 옆에 앉은 사람이 도서관에서 종종 있는 일이니 소지품을 각별히 주의하라는 말을 덧붙인다. 소지품을 그대로 두고 자리를 비워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국에 왜 외국인들이 그리 칭찬을 하는진 새삼 놀라웠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열린 공간에 마련된 좌석이라 소지품에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


+ 도서관 와이파이가 며칠 째 먹통.


처음에는 영국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책을 본다는 사실이 정말 좋았고 ㅅ장서들이 살짝 부럽기까지 했는데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서관 와이파이 때문이었다.  


도서관을 처음 간 날이 일요일이었는데 도서관 와이파이를 이용하려면 회원가입을 해야만 했다. 수차례 시도를 했지만 회원가입이 안 돼서 직원에게 문의를 하니 돌아오는 대답은 '모르겠다'였다. 오늘은 주말이라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내일 다시 와서 회원가입을 시도해 보라는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여긴 한국이 아니지'   

외국인들이 한국생활에서 가장 좋은 점을 이야기할 때 한결같이 얘기하는 것은 AS가 엄청난 속도로 빠르게 처리되는 점을 꼽는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좀 답답하긴 하겠다 싶었는데 막상 내가 경험해 보니 진짜 뚜껑이 열릴 지경이더란 말이지.


월요일에 부푼 희망을 안고 다시 도서관에 갔다. 여전히 회원가입은 되지 않았다. 다시 직원을 찾아갔다. 일요일 근무했던 직원들은 아무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에러메시지가 난 노트북을 보여주니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평일인데도 회원가입이 왜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어학원을 마치고 도서관을 갔기에 시간은 오후 6시를 넘긴 상황. 


"와이파이는 외주를 주는데 그 회사가 퇴근 시간이 지났기에 오늘은 확인이 안 된다. 오늘 너 말고도 회원 가입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며 다른 날 다시 오라고 한다. 하! 이때만 해도 그럴 수 있지 싶었다. 


저녁에 집에 와서 도서관 공식 메일로 문의를 했다. 그랬더니 이미 입력되어 있는 자동문구 답 메일이 왔다. 내용은 빨라도 5일 뒤에나 검토할 수 있으며 해당부서 상황에 따라 답변을 받기까지 5일보다 더 걸린다는 메일이었다. 뚜껑이 열린 건 이때부터였다. 이 무슨 황당 시추에이션 인가 싶었다. 


화요일에도 여전히 회원가입이 되지 않았다. 또 직원을 찾아가니 다행히 일요일에 근무했던 직원이 근무 중이었고 나를 알아본다. 내 상황을 알고 있다며 도서관 전체에 와이파이가 문제가 있다고 했다. 


언제 와이파이 이용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오주라 알 수 없다고.  언제 될지 모르니 계속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단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매번 내가 도서관에 근무 시간인 6시가 지나서 오니까 계속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내일 외주 업체가 근무하는 시간에 회원가입을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다시 직원에게 문의하면 해결해 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와이파이 복구는 언제가 될 지  모른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회원가입이 근무시간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나 싶어 황당했지만 그녀의 말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수요일 어학원 수업을 마치자마자 오후 3시경 도서관 외주업체가 근무하는 시간에 도서관에 갔다. 여전히 같은 상황이다. 다시 또 직원에게 문의를 하러 가니 처음 보는 직원이다. 


일요일부터 회원가입이 안 되고 와이파이 이용을 못하고 있다고 설명을 하니 그녀 왈, 

"일요일에 와이파이 문제없었어."라며 짜증 가득한 얼굴로 "꼭 와이파이 쓰고 싶으면 개인 스마트폰을 쓰던가 다른 도서관을 이용해"라며 속사포 단어를 쏟아냈다.  언제 와이파이 이용이 가능하냐는 내 물음에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무성의하게 '글쎄, 내일, 모래? 어쩌면 다음 주?" 기가 막힌 답변이 돌아왔다. 


영어공부를 위해 인터넷 사용이 필수였던 상황이었고 스마트폰 데이터가 남아도는 상황이었기에 굳이 도서관 와이파이를 고집할 이유는 없었으나 화면이 작은 스마트폰에 의존하기에는 너무 불편했다. 도서관 와이파이가 안 돼 스마트폰 테더링을 연결해 노트북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되지 않았다. 내 스마트폰이 런던 인터넷이 아니라 몰타 유심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보완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도서관 안에서는 스마트 폰 테더링이 되지 않았다. 


내가 하도 쩔쩔매니 옆에 앉은 런더너가 마침 자신이 IT 전문가라며 도와주겠다고 노트북을 이리저리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자신은 도서관 로그인에 문제가 없어서 도서관 와이파이를 사용하고 있는데 왜 회원가입도 안 되고 개인 스마트폰 테더링이 안 되는지는 도저히 모르겠다고 했다. 결국 런던 도서관 와이파이 사용은 포기하고 스마트 폰을 사용했다. 


한국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도서관 공공 와이파이가 며칠 째 먹통인데도 고칠 생각조차 없어 보였고 일요일 처음 만났던 직원을 제외하고 사서들의 응대 태도도 너무 시니컬했다. 영국 최고의 도서관이고 장서보유만도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면 뭐 하나 싶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어학원이 엔젤 역으로 이사를 가면서 런던 도서관은 더 이상 가지 않았다. 

회원 가입도 스마트폰 테더링도 연결되지 않던 런던 도서관에 울화통이 터졌다.


+  서더크 헤리티지 센터 앤드 월워스 도서관(Southwark Heritage Centre and Walworth Library) 


8월 말에 템즈강 위쪽에서 남쪽으로 이사를 왔다. 서더크(Southwark) 지역에 속하 엘리펀트 캐슬로 런던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샤드가 정면으로 보이고 템즈 강 테이트모던까지 버스를 타면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고 천천히 걸어도 2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주변으로 버로우 마켓, 셰익스피어 글로브극장, 더 샤드, 타워브리지, 버틀러 워프, 테이트 모던 등이 전부 이 지역 명소들이다. 


이사를 오자마자 가장 먼저 간 곳은 관광객들은 무조건 방문하는 서더크의 명소가 아니라 집 근처 도서관이었다. 그만큼 영어 공부에 절박했다. 집에서 도로를 건너 아름드리나무들이 즐비한 공원을 가로질러 5분 정도 걸어가면 구립도서관 격인 '서더크 헤리티지 센터 앤드 월워스 도서관' 있었다. 


도서관도 좋아했지만 실상은 도서관 가는 길을 더 좋아했다. 엘리펀트 캐슬은 길 하나를 두고 재개발이 된 지역이라 신구의 조화가 묘한 곳이었다. 공원 안에 작은 개울이 흐르고 너른 잔디밭과 아름드리나무들이 즐비한 곳이라 공원을 가다가 마음이 동하면 더러는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고 영어 단어를 외우기도 했다. 

행복했던 도서관 가는 길


이름이 너무 길어 풀네임을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서더크 헤리티지 센터 앤드 월워스 도서관'이다. 2층 규모의 작은 도서관인데 지역 커뮤니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열람석은 몇 자리가 없지만 동네 도서관이라서 그런지 이용하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다만, 도서관인데도 조명이 너무 어두워 개인 독서등을 들고 다녀야 했다. 

2층 규모의 동네 도서관 


+ 성별이 이렇게나 많아요? 

사서에게 도서관 이용에 관해 물었더니 도서관 출입은 아무나 가능하고 책을 빌리지 않을 경우에는 도서관 회원증은 필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도 와이파이 이용을 위해서는 회원가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간편하게 내가  온라인으로 회원가입을 하면 되지만 이왕이면 모든 경험은 다 해보고 싶어 도서관 회원증을 만들기로 했다. 


도서관 사서는 나와 정면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책상이 측면으로 향하고 있어 옆얼굴을 보면서 도서관 회원증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사서는 회원가입 신청서를 내밀며 나에게 얼굴을 돌리는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그 사람은 그 혹은 그녀, 두 얼굴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얼굴의 반은 정확히 남자고 나머지 반은 여자였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여자의 얼굴은 예쁘게 화장을 하고 머리도 길렀고 남자의 얼굴은 그에 맞는 메이커업과 스포츠 형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처음 옆얼굴을 봤을 때는 스포츠 형의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는 남자였는데 사서가 남자인 줄 알았는데 얼굴을 획  돌리자 갑자기 여자 얼굴이 나타났다. 얼굴의 반에 두 성별이 있으면 기괴할 만도 한데 생각만큼 기괴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였다. 


예전에 외국 가수(듀랸듀랸이었나?)의 뮤직비디오에서 남자인 채로 옆으로 서 있다가 획 반대편으로 돌면 여자의 모습이라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그 순간이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사서는 몇 가지 설명을 위해 앉은자리에서 일어섰다. 영락없는 남자인데 짧은 치마에 그물스타킹과 구두를 신고 네일아트까지 한 예쁜 손가락으로 내가 채워야 할 곳을 일일이 집어가며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나는 너무 당황했지만 당황한 티를 내면 왠지 실례가 될 것 같아 무척이나 애를 써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커밍아웃을 하는 것도 여전히 쉽지 않은 상황인데 나름 공공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도서관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차림새로 근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더 놀라운 건 회원가입에 이름, 주소, 국적 등을 적고 난 뒤에 성별을 체크하는 문항에 또 한 번의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성별을 세분화한 가입 신청서  


 내가 알고 있는 단어 외에도 시스젠더(Cisgender), 데미젠더(Demigender), 투스피릿(Two-Spirit), 젠더퀴어(Genderqueer), 젠더플루이드(Genderfluid) 등 생전 처음 보는 생소한 단어들이 열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트랜스젠더는 그렇다고 쳐도 다른 단어는 도대체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통상 남자와 여자 단 두 개의 성별 외에 한 번도 제3의 성별에 대해서 생각도 해보지 않았기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나중에 무슨 뜻이었는지 너무 궁금해서 단어의 뜻과 맥락을 찾아봤다. 성별 식별이 없는 상태(무성), 성별 정체성이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상태, 태어날 때 생물학적 성과 현재 성별이 다른 경우, 부분적으로 특정 성별 식별인 경우, 심지어는 특정 목록에 나열되지 않은 다른 성 정체성이 있는 경우 등 자신의 생물학적인 부분뿐 아니라 문화적, 정신적인 부분까지 모두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것이 처음인 나로서는 문화적 충격이긴 했다. 


성 정체성이라는 게 '선택'의 문제가 아님에도 성 정체성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많은 차별과 혐오가 심한 한국 사회와 달리 영국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다양성과 포용성은 실로 놀라웠다.  우리나라 공공 도서관에 성별 표시에 이런 리스트를 만든 곳이 있다면 9시 톱 뉴스로 보도가 될 사안이지 않겠는가. 


영국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다양성과 포용성을 반영해 전통적인 남성 및 여성 외에 성별 옵션을 허용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막상 도서관 회원가입 성별 체크리스트를 보니 솔직히 엄청 당황스러운 것이 보니 나름 성정체성에 대해서는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속으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태연함을 가장한 채 다른 기입사항을 적어 넣고 가입서를 제출하니 그 자리에서 바로 도서관 카드를 발급해 준다. 이곳에서 두 달 남짓 생활할 예정이라 도서관 회원증을 쓸 일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막상 도서관 카드를 받아 드니 뭔가 묘하게 뿌듯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동네 작은 도서관이지만 있을 건 다 있다.


서울에서도, 제주에서도, 울산에서도 내가 거주했던 지역에서는 어김없이 다양한 도서관을 이용해 봤다. 지역마다 도서관마다 나름의 특색이 있었는데 적어도 서더크 헤리티지 센터 앤드 월워스 도서관 같은 곳은 없었다. 


도서관 1층에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런 것 치고는 자리를 너무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이 동네 집을 구할 때도 동네가 어떤 곳인지는 전혀 몰랐고 단 하나  어학원까지 가깝다는 것만으로 선택한 곳이었다. 도서관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찬찬히 전시를 훑어봤다.  


다양한 인종들이 살고 있는 이 지역은 로마 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된 유서 깊은 지역으로 중세까지 템즈강을 끼고 있어 영국 남부지역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거쳐가는 관문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도시가 커지면서 템즈 강 무역이 줄어들고 경제권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슬럼가로 변해갔다. 런던에서도 오랫동안 우범지대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었다. 그랬던 곳이 재개발되면서 지금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탈바꿈했다. 


그런 과정들이 모두 기록으로 남았고 지난 2천 년의 시간 동안 이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삶을 영위했는지 아카이브 형태의 전시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서관 앞에 다소 긴 이름인 '서더크 문화유산 센터'가 함께 표시된 이유이기도 했다. 


도서관이 단순히 책과 관련된 활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담론과 건강한 시민 사회를 지원하기 위해 도시를 재개발하는 시점부터 지역사회의 커뮤니티와 함께하는 유, 무형의 공간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은 놀라웠다. 슬럼가였던 동네에서 지역주민들이 살만하다고 느끼는 동네로 재탄생하기까지의 과정, 현재에도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지역 커뮤니티에 참여해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그 중심에 도서관이 있었다.  


이런 멋진 역할을 도서관이 해내고 있을 줄이야. 

2000년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아카이브 전시  


+ 다음 이야기 : 현지인들과 함께 한 도버 해협 트레킹 [런던 트레킹]  





+ 구독하기, 라이킷, 댓글 부탁드려요~ 글 쓰는데 큰 힘이 됩니다. ^^

+ 알림 설정을 해두시면 가장 먼저 글을 받아보실 수 있어요. ^^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몰타'는 브런치북에서 볼 수 있습니다.




#런던어학연수 #런던라이프 #런던여행 #런던 #london #londonlife

#몰타어학연수 #몰타라이프 #몰타여행 #몰타 #malta #maltalife



이전 12화 입이 쩍, 콜드플레이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