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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해경 Dec 17. 2023

누가 보면 석박사학위라도 따는 줄 [런던 어학연수]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16 인터미디어트 레벨 통과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16 인터미디어트 레벨 통과 


런던에서 수업은 몰타와 같은 레벨인 인터미디어트에서 시작했다. 원래는 무조건 레벨테스트를 봐야 하는데 몰타에서 프리인터미디어트에서 인터미디어트로 올라갈 때 너무 고생을 해서 시험트라우마가 생긴 상황이었다. (https://brunch.co.kr/@haekyoung/133)


에이전시에게 레벨테스트를 다시 보면 토가 나올 것 같아 도저히 시험을 못 보겠으니 몰타 레벨인 인터미디어트로 수업을 받고 싶다고 요청했다. 다행히 시험은 보지 않았고 인터미디어트 반으로 배정받았다. 다만 첫날 오리엔테이션 후 다 같이 모여 있을 때 몇몇 선생님들이 들어와서 학생 한 명 한 명 간단하게 영어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스피킹 테스트였다. 


몰타에서 인터미디어트는 2주 있었지만 시험 통과하고 나니 진이 빠진 상태여서 공부에 거의 손을 놓다시피 했다. 어차피 인터미디어트부터는 런던에서 공부를 하자고 생각을 했기에 공부에 더 의욕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아예 어학연수를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던 런던 어학연수였다.   

런던에서도 몰타에 이어 B1+ 인터미디어트부터 시작 


 가장 차이가 큰 건 '문법'. 

프리인터미디어트에 있을 때 시험을 3번이나 떨어지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적어도 내 기준에선 한국에서 배운 문법이 공부에 더 방해가 됐다. 특히 한국식 해석이 들어가니 같은 뜻인데도 사용이 천차만별인 조동사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또한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시제들은 간단한 문장 안에서 시간의 순서대로 섞어 놓으니 완전 멘붕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소위 말하는 '왕래발착동사' 경우 (영어에는 이런 말이 없다) 왜 그 동사들이 미래를 사용하지 않고 현재 시제를 사용하는지 원리를 모르고 덮어놓고 '현재'다 이렇게만 외운 상태였다. 그러나 원어민의 경우 문장 이 길어질 때 시간의 순서, 전후 맥락이 필요했고 왕래발착동사가 왕래발착의 의미인지 아니면 단순 현재인지 뉘앙스를 파악해서 때로는 현재, 때로는 미래를 현재, 때로는 미래동사까지 전부 정확하게 구분해서 사용했다. 한국어로 해석은 세 가지 모두가 다 똑같으니 처음에는 뉘앙스 파악이 안 돼서 미칠 노릇이었다. 완료가 들어가는 경우 우리가 생각할 때는 다 비슷한데 영어로는 완전히 다른 뉘앙스다. 이런 문제의 경우 내용은 알아도 막상 시험에 나오면 십중팔구 다 틀렸다. 


어학연수 전에 미리 문법을 공부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받아서 문법을 공부했고 따로 노트 정리도 했지만 다 무용지물이었기에 공들여 정리한 노트도 결국 버렸다. 같은 조동사로 해석하지만 문법에선 'auxiliary verb'와 'madal verb'로 구분하니 한국에선 한 번도 이렇게 배워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 어학연수를 앞두고 공부는 무얼 준비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무조건 문법영어어휘를 익히라고 조언하고 싶다. 아직도 present perfect participle는 눈으로는 알겠는데 입으로 말할 때는 여전히 꼬인다.)  


문법이 잘 이해가 안 될 때는 한국인이 설명하는 유튜브를 찾아보기도 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헷갈리니 영어 유튜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이 되니 뉘앙스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영어 유튜브의 설명이 훨씬 이해하기가 쉬웠다. 특히 상위 레벨로 갈수록 영어로 설명을 듣는 것이 점점 더 편해졌다. 


다행히 몰타에서 시험을 3번이나 보는 동안 문법(특히 시제) 공부를 엄청했었기에 인터미디어트에서 문법 공부는 크게 어렵지가 않았다. 수업 시간에 프리인터미디어트보다 좀 더 깊게 문법이 들어가지만 특별히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문법 실력이 늘어 있었다.  어퍼인터미디어트 수업을 들을 때도 도치구문 등 몇 가지를 제외하면 문법 공부는 크게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몰타에서 죽기 살기로 문법을 공부했을 때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공부를 할 때는 진도가 나가지 않고 지루하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때 제대로 다져놓은 덕분에 문법에는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됐다. 당시에는 내가 얼마나 적의를 품고 공부를 했었는지 두 번 다시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 덕분에 런던에서 문법공부는 비교적 수월했다. 


참고로 인터미디어트에서 문법은 관계대명사 한정적 용법(Relative clauses), 비교급 최상급, 과거에 일어난 (일어나지 않은) 일의 표현, 현재분사 진행과 현재를 함께 사용하는 시제, 시제가 다 섞이는 조건절 등을 배운다. 이미 낮은 레벨에서 배웠던 과거, 과거 진행, 과거완료의 경우에도 서술형 시제(narrative tenses)라고 해서 좀 더 긴 문장에서 어휘와 함께 시제를 익히는 연습을 한다. 

시제쯤이야


인터미디어트에서 배우는 문법 들


+ 난이도가 달라지는 리스닝과 스피킹 

레벨이 바뀌게 되면 가장 먼저 어렵다고 느끼는 건 리스닝이다. 초급이라고 할 수 있는 프리인터미디어트와 가장 다른 건 지문의 양이 배 이상으로 늘어나고 속도도 원어민 수준으로 빨라진다는 점이다. 지문을 다 듣고 있기도 숨이 찰 정도였다. 잘 안 들리는 것도 문제지만 지문이 워낙 길어 중간즈음이 되면 앞의 내용을 종종 까먹는다. 수업이 계속 진행되고 시간이 흐르면 리스닝은 점차로 좋아졌다. 

프리인터미디터의 보다 두 배 이상 길어지는 지문과 원어민에 가까운 속도인 인터미디어트


+ 분위기가 다른 스피킹 

레벨이 올라가면 첫 주가 가장 힘든데 레벨이 다른 리스닝과 스피킹에서부터 확 차이를 느끼게 된다. 다른 학생들은 이미 그 반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아무래도 처음 수업을 받는 나보다는 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런던의 경우는 몰타보다 그 차이가 컸다. 몰타에서도 인터미디어트 반으로 처음 갔을 때 친구들이 다 스피킹을 엄청 잘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런던은 그 수준 이상이었다. 


런던의 경우 영어권이 아닌 비 영어권 유럽국가에서 휴가동안 1주 혹은 2주 정도 단기로 어학연수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특히 여름에는 학생의 70%가 대부분 4주 이하의 단기 어학연수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의 경우 스피킹은 거의 어퍼나 비즈니스 클래스일 정도로 유창한데 다만 레벨테스트 시험이 인터미디어트일 뿐. 지속적으로 영어 환경에 노출되기 위해 매번 휴가기간을 이용해 수시로 어학연수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학연수는 평생에 한 번으로 여기는 우리와 달리 같은 유럽권이니 어학연수가 특별한 우리와 달리 그들의 경우 런던 일주일 머물면서 반나절은 어학원 출석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런던을 여행하는 것이었다. 


특히 여름에 어학연수를 하는 경우는 스피킹으로만 따지면 비즈니스클래스여도 무방한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게다가 어휘까지 휘황찬란하니 그들의 하는 말을 거의 못 알아듣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때로는 그런 아이들과 파트너를 할라치면 내가 그들에 비해 스피킹이 너무 부족하니 그것도 스트레스였다. 그들이 나를 파트너로 꺼려하기 전에 그들과 파트너가 되지 않기 위해 내가 먼저 요령껏 자리를 피해서 앉았다. 


프리인터미디어트까지는 스피킹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인터미디어트로 오니 갑자기 모든 게 다 총제적 난국이었다.  그중에서도 너무 부족한 어휘가 가장  문제였다.  



+ 문제는 어휘

런던 어학원 첫날 완전 멘붕이 됐다. 

몰타에서는 정규수업 외에 개인과외로 일주일에 두 시간씩 문법 과외를 받은 게 전부였다. 프리인터미디어트까지 몰타에서 수업을 했는데 내게는 수준이 생각보다 쉬웠다. 새로운 단어들이 나오긴 하지만 단어가 크게 어렵지 않아 외우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고 외운 단어를 활용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문법 외에는 영어 공부에 큰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 


몰타에서 어학연수도 좋았지만 런던에서는 좀 더 제대로 공부를 해보고 싶었기에 정규수업 시간 외에 추가로 인텐시브 수업으로 인터미디어트 레벨에 맞는 어휘 수업을 따로 신청했다. 어휘 수업 때 1차 멘붕이었고 정규수업 때 2차 멘붕이 왔다. 


어휘 수업은 아는 단어가 30%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정규수업은 50% 정도였다. 이러니 수업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교재의 경우 미리 완벽하게 예습을 해서 리스닝, 리딩, 스피킹이 실력이 모자라다는 걸 어느 정도 감출 수는 있었다. 어휘 수업의 경우 예습은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파트너와 스피킹을 많이 하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교재에 모르는 단어가 수두룩


모르는 단어 투성이었던 어휘수업


더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EC 런던의 경우 한 선생님이 교재를 일주일 내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재는 월, 수, 금 3일만 활용하고 화, 목의 경우 다른 선생님이 자신이 따로 준비한 내용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시스템이었다. 교재도 없고 미리 어떤 공부를 할지 알 수가 없으니 예습도 할 수 없어 대략 난감이었다. 


처음 수업을 담당했던 선생님이 준비해 오는 자료들은 난이도가 꽤 있었다. 때로는 난이도가 조금 낮은 날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게는 쉽지 않았다. 주로 리딩 위주의 수업이었는데 모르는 어휘도 수두룩하고 어휘를 안 다고 해도 문장 해석이 제대로 안 되니 내용 파악도 힘든데 전후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유추해서 말하라고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이 선생님의 경우 모든 학생 한 명 한 명 돌아가면서 무조건 말을 시키는 선생님이었기에 예습도 할 수 없는 수업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수업에 스트레스를 받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기후 변화에 관한 내용을 공부하는 날이었는데 사바나 기후 등 생판 듣도 보도 못한 어휘가 쏟아져 나와 그날 수업은 까다로웠다. 교환 학생으로 일본에서 온 친구가 유독 힘들어했는데 수업을 다 마치고 난 뒤에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냈다.  사실 내 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 대신 울어줘서 오히려 고마웠다고나 할까.

해석도 잘 안 돼 런던 어학연수 초반에는 꽤 힘들었다. 


그 학생이 사무실에 얘기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음 주에 선생님이 바뀌었다.  새로 바뀐 선생님인 데미안은 정규수업 때 미처 다 다루지 못한 부분이나 보충이 필요한 부분 위주의 수업이었다. 보충으로 문법을 배울 때는 첫 시간에 이론을 하고 두 번째 시간에는 무조건 그날 배운 문법만 사용해서 스피킹을 하도록 유도하는데 게임처럼 진행하니 재미있기도 하고 기억에도 잘 남았다. 


가끔 구동사나 이디엄 수업을 하기도 했는데 굉장히 유익했다. 트레킹을 함께하는 현지인들이 나에게 런던에 대한 소감을 물을 때 이 수업 때 배운 이디엄 중 '런던이 집처럼 익숙하다(feel right at home)'나 '여행 가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다(get itchy feet)'를 사용해보곤 했다. 그럴 때면 그들이 '오~ 그런 표현도 아냐'며 치켜세워주기도 했다. 


런던에서 어학연수는 여러 가지 좋은 경험이 많았는데 그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여러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다양한 교수법을 체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거의 10명이 넘는 선생님에게 수업을 들었고 그 덕분에 각 선생님마다 가지고 있는 효과적인 교수법을 자연스레 알게 됐고 내가 혼자 영어공부를 할 때 어떤 식으로 하면 되는지에 대한 나름의 노하우도 터득했다고나 할까. 런던에 있을 때는 ec 런던에서 배운 선생님의 노하우를 활용해 초등학생 정도의 영어는 가르칠 수도 있겠다는 돼도 안 되는 자신감이 넘치기도 했다. 

화, 목 선생님이었던 데미안 
주사위 게임으로 진행됐던 데미안의 문법 수업
여행관련 이디엄은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다.  



+ 일주일에 한 번은 결석하다. 

모든 수업에서 모르는 어휘가 50% 이상이니 솔직히 말하면 수업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다시 프리인터미디어트로 내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정규수업과 인텐시브 수업을 통틀어 하루에 모르는 단어가 최소 50개 이상이나 쏟아졌고 많은 날은 100개가 넘어가기도 했다. 게다가 수업 전 교재에 나오는 모든 내용을 예습하지 않으면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우선은 어휘가 가장 문제였기에 어휘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모르는 어휘는 따로 나만의 방식으로 어휘노트를 만들었다. 가급적 그날 배우는 내용 중에 모르는 어휘는 다 외우지는 못하더라도 어휘정리는 반드시 하는 거로 원칙을 세웠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 수준에 비해 공부해야 할 분량이 너무 많았다. 어휘도 정리해야 하고 정규수업 예습도 해야 하니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어휘노트를 만들고 이걸 그대로 구글이 읽어주는 것을 녹음해 매일 듣고 다녔다. 영어 공부를 위해 지금도 가끔 듣는다.


결국 고민 끝에 일주일에 하루는 결석을 하고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매일매일 외워야 할 단어와 표현이 엄청난 분량으로 쏟아졌다. 수업 마치고 나면 어학원에서 공부하다가 도서관으로 직행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저녁 10시가 넘어야 집으로 돌아갔다. 토요일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대략은 매일 8시간 이상을 영어 공부만 했던 것 같다.  막상 공부를 해보니 하루도 쉬지 않고 공부를 하는 건 무리라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만 쉬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누가보면 석박사 학위 딸 사람처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실상은 중고등학교 때 외웠어야 할 단어를 뒤늦게 외우고 있자니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러니 공부도 다 때가 있다는 옛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가끔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공부만 하는 것에 현타가 오기도 했다. 나라고 왜 런던에 살면서 여기저기 구경을 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런던은 나중에 다시 올 수 있어도 공부는 이때가 아니면 못할 것 같았기에 매일 런던 여행과 공부사이에 마음은 줄타기를 했야 했지만 마음은 공부 쪽으로 기울었다.  매일 외우고 까먹고를 반복하고 있으니 50대라는 나이가 야속하기 그지없는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공부는 더 힘들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여행과 어학연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보겠다 생각했던 것은 적어도 나로선 불가능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학생모드로 살았던 런던의 생활


그렇게 한 달이 흐르고 나니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교재의 경우 수업 시간 전에 모두 예습을 했고 수업 시간에 한 번, 집에 와서 복습으로 한 번 보게 되니 적어도 교재는 3번을 반복해서 봤다. 

어휘의 경우 노트에 정리한 어휘들을 모두 구글에 입력해 구글이 읽어주는 것을 그대로 녹음을 했고 이동시간에는 무조건 녹음한 어휘를 들으며 복습을 했다. 책상에 앉아서 하는 공부가 능률이 오르지 않을 때면 근처 공원이나 템즈강변 산책을 하면서 네이버 영어 사전에 저장한 어휘나 구글 녹음한 어휘를 무한반복 들으며 외우려고 노력했다. 


처음에 모르는 어휘 투성이었는데 다 외우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한번 봤다 싶은 어휘들이 점점 늘어나니 수업이 편해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시간이 지나니 각각 다른 수업에서 배웠던 어휘들이 연관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어느 순간이 지나가니 시너지 효과가 상당했다. 생각해 보면 인터미디어트 당시에 영어 인풋량이 엄청났던 것 같다. 


나중에는 모르는 어휘가 있어도 어휘를 설명해 놓은 문장을 보면 얼추 이 단어가 이런 뜻이지 않을까 유추가 가능했고 80% 정도는 맞아 들어가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어학공부에서 인풋이 중요하다는 말을 숱하게 듣긴 했지만 실제로 인풋의 놀라운 효과를 내가 실지로 느껴보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수업 시간에도 계속 반복되는 어휘들


런던은 어느새 9월로 접어들었다. 어학원에도 변화가 생겼다. 여름동안 단기로 왔던 학생들은 모두 돌아갔다.  나도 초반에는 거의 입을 떼지 못하거나 묻는 말에 겨우 대답 정도만 하던 수동적인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어휘에 자신감이 붙고 나니 수업시간에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왔고 적극적인 학생이 됐다. 


대략은 12명 정도가 한 클래스인데 그중 3~4명 정도만 3개월 이상 어학연수생이었다. 그러다 보니 단기로 오는 학생들과 달리 자연스레 그들과 친해졌고 학생이 매주 바뀌는 가운데 그들과 유대감은 몰타에서처럼 끈끈해졌다. 공부는 힘들었지만 친구들이 있어 괜찮았다. 일주일에 한 번 금요일에는 같이 외식을 하기도 했는데 다들 한식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가끔은 한식을 함께 먹으며 우정을 쌓았다. 공부만 하고 있다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런던 생활에 스며들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런던에서 한식을 먹으며 힘 불끈


+ "해경, 시험을 보는 게 어때?" 


인터미디어트에서 6주 차가 됐다. 단기로 온 학생들이 다 돌아가고 친구들도 어퍼인터미디어트로 레벨업을 하면서 우리 반에서는 내가 가장 오래 있는 학생이 됐다.  처음에는 시험을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느 정도 답답함이 가시고 나니 수업이 슬슬 지루해지고 있긴 했지만 아직 시험을 보기에는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모든 걸 예습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수업이 어렵지 않은 것이라 여겼다. 


친한 친구들은 나보다 인터미디어트 수업을 먼저 시작했기에 1~2주 간격으로 레벨테스트를 통과했고 둘은 같은 어퍼인터미디어트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반이 달라지니 쉬는 시간마다 휴게실에서 만났는데 그때마다 친구들이 시험을 보라고 성화였다. 어퍼인터미디어트에서 수업을 받아보니 나보다 훨씬 말을 못 하는 애들도 있다며 나 정도면 충분히 수업을 따라갈 수 있다고 나보다 그들이 더 난리였다. 


얼굴을 볼 때마다 "컴온~, 해경, 너의 자리 여기에 비워놨다. 너 시험 언제 볼 거냐, "고 독촉을 했다. 


프리인터미디어트일 때 시험을 3번이나 떨어져서 시험이라고 하면 넌더리가 나는 상황이었기에 좀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다 시험을 봐야겠다 결심한 순간이 왔다.  퀴즈를 푸는 시간에 항상 순위권 밖이었는데 한 달이 넘어가면서부터 항상 순위권 안에 내 이름이 있었다. 


그래, 결심했어! 일단 시험을 보기나 하자. 

매 퀴즈마다 순위권에 랭크 


+ 7주 만에 레벨테스트 통과 

한 주를 보내고 7주 차 시험을 보겠다 마음먹고 나니 그때부터 어찌나 떨리던지 뒤늦게 내가 시험에 이렇게 트라우마가 생길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그동안은 어휘에만 집중을 했기에 하루 결석을 하고 하루 종일 교재에 나오는 문법을 훑고 또 훑었다. 


그날 저녁, 떨리는 마음으로 시험에 응했다.  

 

시험은 프리인터미디어트보다 난도가 있었지만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다만 영작은 주어진 주제부터가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냈을 때 어떤 일이었는지, 어떤 느낌이었는지, 다른 사람과 어떻게 공유하고 싶은지 써라>   한국에서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주제를 영어로 쓸려니 대략 난감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단 10분인데 지문에 제시된 내용을 다 담아야 하니 무엇으로 주제를 잡고 글을 써야 할지도 난감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가 지금 영어를 배우는 과정과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솔직하게 적었고 우리 인생과 비슷하다는 논조로 마무리를 지었다. 하마터면 제출을 못할 정도로 찰나의 순간에 겨우 답안지를 체출했다. 


다음 날 어학원을 가니 다니엘이 내 시험결과지를 출력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런던의 경우 몰타와 달리 선생님에게 시험을 보겠다고 말할 필요 없이 EC 런던 홈페이지에 4주가 지나면 시험 버튼이 생성되어 있었다.  몰타에서는 시험을 선생님이 채점을 하고 수업시간에 결과를 알려주는데 런던에서는 학업관리만 담당하는 선생님이 다니엘의 소관이었다.  


사무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 입구에서 몸을 반쯤 가린 채 얼굴만 내민 상태로 쭈뼛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제 시험을 봤다고 했다. 다니엘이 '컴온~ 너 기다리고 있었어. '라며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넨다. 


"이제껏 이 주제에 대해 이런 내용으로 에세이를 쓴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정말 좋은 글이었다." 


폭풍 칭찬에 휘둥그레졌다. 그러면서 어떤 점이 좋았고 어떤 점에서 실수가 있었는지, 무엇을 더 공부해야 하는지 세세하게 설명해 준다. 말미에는 용기와 격려도 잊지 않았다. 그의 진심 어린 칭찬이 어찌나 다정한지 감동이었다. 시험을 통과해서 좋기도 했지만 진심을 다한 칭찬에 더 울컥했던 것 같다.  

인터미디어트 시험 스코어  
틀린 문제만 따로 뽑아서 설명을 해준다. 


시험 결과지를 받아 들고 제일 먼저 어퍼인터미디어트에 있는 친구들을 찾아갔다. 내가 일부러 죽상을 한 얼굴로 갔더니 '괜찮아, 다음 주에 또 보면 되지'라며 위로를 건네려던 찰나-


"짜짠, 나 시험 통과했어!"라고 했더니 애들이 뛸 듯이 기뻐하며 박수를 치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나보다 더 기뻐하는 친구들


몰타에서 런던으로 올 때 계획은 어퍼미디어트에서 어학연수를 마치는 것이었는데 7주 만에 어퍼인터미디어로 올라갈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내가 생각했던 시간보다 훨씬 빨랐기에 이게 맞나 싶어 약간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거의 한 달 반 미친 듯이 영어 공부만 하면서 보낸 덕택에 어학연수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뭔가 살짝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주변에서는 내가 7주 만에 어퍼인터미디어트를 간다고 하니 너무 빠르다며 다들 놀랐다. 그들이 더 놀란 건 다른 이유였다. 런던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동영상에서 오른쪽) 세실리아의 경우 작년에 이미 런던에서 6개월간 어학연수 했고 올해 다시 8개월간 어학연수를 이어서 하면서 이제 어퍼인터미디어라고 했다. 그러니 내가 3월 초 엘리멘트리에서 시작해 9월 초, 그러니까 6개월 만에 어퍼인터미디어트에 간 게 더 놀랍다고 했다. 사실, 내 경우에는 이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싶긴 했다. 몰타에서 레벨테스트만 잘 봤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빠른 레벨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 교재 어퍼인터미디어트


어쨌거나 또 한고비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넘어 정말 다행이다 싶었지만 이때는 몰랐다 또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어퍼인터미디어트는 또 다른 신세계였다. 미리 말하자면 인터미디어트 때 공부는 공부도 아니었다. 훨씬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 다음 이야기 : 런던은 뮤지컬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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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몰타'는 브런치북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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