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폼페이, 쏘렌토 전망대, 아말피 해안도로, 포지타노
원래는 어학연수가 끝나는 기간에 맞춰 지인이 몰타로 휴가로 올 예정이었기에 애초에 로마와 피렌체 외에 다른 도시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지인의 휴가가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취소가 되면서 갑자기 열흘 정도 시간이 남는 상황이 됐다. 그 시간에 뭘 할까 고민을 하다가 어차피 로마와 피렌체에 머물 예정이니 내친김에 이탈리아 다른 도시들도 가보고 싶어졌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올랐던 도시는 폼페이였다.
'폼페이'는 화산폭발로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곳이었기에 꼭 한 번은 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이왕 남부로 가는 것 폼페이 외에 다른 도시는 없나 살펴보던 중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마이리얼트립에서는 여러 여행사들이 로마 남부도시를 묶은 다양한 여행상품을 운영하고 있었다. 폼페이, 소렌토 전망대를 거쳐 포지타노까지 로마 당일치기투어였다. 하루 만에 세 군데를 본다는 건 자유여행으로는 무리였기에 시간도 줄일 겸 투어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폼페에는 로마에서 250km 떨어져 있는데 포지타노까지 갔다가 로마로 귀환하는 일정이라 대략 14시간이나 걸리는 강행군이었다. 집합시간 오전 6시 20분, 혹시 모임에 늦을까 봐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로마의 11월, 아직 동이 채 트기도 전. 전용버스를 타고 폼페이로 향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제야 서서히 동이 터온다. 그렇게 또 한참을 달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깐 쉴 때 간단하게 커피와 빵으로 아침 허기를 달랬다.
드디어 폼페이에 도착했다. 2천 년 전 화산폭발로 한 순간에 사라진 도시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는데 시내는 아니었고 유적지가 따로 있었다. 폼페이 안내도를 보면 도시 자체가 물고기 모양과 너무 흡사해 깜짝 놀랐다. 일부러 물고기 모양으로 설계를 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원래도 주출입구도 물고기 입 쪽으로 들어가 꼬리 부분으로 나오도록 있다고 하니 참 공교로운 느낌이었다. 투어의 경우 발굴된 유적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배부분을 보게 되는데 지도의 VII, VIII에 해당된다.
서기 79년 8월 24일 화산폭발로 인해 시간이 멈춘 폼페이는 단 18시간 만에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가 1592년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도시다. 여러 과정을 거쳐 여전히 지금도 발굴 중인데 9개의 지역으로 나누고 개별 주택인 도무스의 입구에 번호를 매겨 관리가 되고 있었다.
사실, 폼페이가 화살폭발로 사라졌던 도시라는 것 외에는 큰 정보가 없었기에 입구에서 이 지도를 볼 때도 폼페이가 어떤 곳인지 감이 잘 안 왔다.
베수비오 화산이 보일 줄 알았는데 입구에서도 화산은 보이지 않았다. 폼페이는 기원전 80년 경 로마에 편입되기까지 그리스 영향 아래에 있었던 도시였다고 하는데 그런 폼페이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티켓부스에서 정원을 따라 한참 걸어 올라가니 드디어 폼페이가 나타났다.
화산재에 묻힌 도시 폼페이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된 것은 대극장이다. 폼페이가 발굴되면서 '로마의 축소판'이라고 불릴 정도로 로마라는 도시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수천 년간 화산재에 쌓인 덕분이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대극장으로 향하는 마당은 검투가 벌어졌던 곳이고 검투사 경기가 활발하게 진행될 때는 숙소로 사용됐던 곳을 지나 반원형의 대극장에 들어서니 기분이 묘했다. 실제로 폼페이에는 3개의 원형극장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 물고의 눈의 자리에 있는 대극장이 로마의 콜로세움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반원형의 대극장은 꽉 차면 2천 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상당했다. 원형극장의 자리는 철저히 신분에 의해 정해졌는데 맨 앞쪽은 귀족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신분이 낮은 사람이 앉았는데 하얀 대리석인 곳은 복원된 곳이었다. 이곳도 역시 천장 부분에 차양이 설치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극장에 오면 너나없이 가이드들이 무대 정중앙에서 소리를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건 바로 공명 시범이다. 마이크가 없던 시절에 맨 뒷좌석까지 소리가 들릴 수 있었던 건 바로 '공명'이었다. 근데 정말 신기한 것은 무대의 정중앙에서만 소리가 공명되고 옆으로 한 발자국만 움직여도 공명이 사라졌다.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가이드가 시범을 보이자 '와-' 탄성이 터졌다. 이때는 나도 신기했는데 나중에 터키 각 지역에서 원형경기장을 여러 번 볼 기회가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매번 공명을 실험하니 나중에는 감흥이 좀 떨어지긴 했다.
극장을 나서면 비로소 폼페이 도시의 풍경을 만난다. 평지에 있을 줄 알았던 폼페이는 생각보다 꽤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다 사라졌고 형태만 남아 있는데 규모나 크기가 상당했다. 대략적으로 전체 폼페이는 66만 제곱미터라는데 여의도 공원의 3배에 달하는 크기에 8개의 문과 12개의 사각탑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동서와 남북을 잇는 큰 도로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는 현재의 도시 모습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이곳이야말로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 아닐까 싶었다.
도로는 그리 넓지 않은데 모든 도로들이 중간이 낮고 양옆이 높아 단차로 만들어졌는데 중간이 말하자면 차도, 당시에는 차가 없었으니 마차가 다니던 길인 셈이다. 이렇게 단차를 만든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물이 오면 물이 바다까지 배출될 수 있는 자연 빗물처리 시스템이었다고 한다.
특이한 건 대부분이 도로에는 일정 구간마다 이런 큰 돌들이 놓여 있는데 비가 많이 올경우 자칫 도로에 물이 고이게 되면 사람들이 물에 젖지 않고 지난갈 수 있도록 놓아둔 돌이었다. 이 돌의 또 다른 용도는 마차의 두 바퀴 사이의 간격에 딱 맞아서 이 돌들 사이를 지나다닐 수 있는 규격의 마차들만 통행이 가능했으리라 짐작이 된다. 말하자면 자동차 바퀴 사이의 거리를 표준화한 셈이다.
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어 있는 도로들이 전부 마차 통행이 가능한 건 아니었다. 모든 관공서 시설이 있는 메인광장은 마차 출입이 되지 않는데 길의 끝에는 이런 비석돌을 세워두고 마차가 통행할 수 없는 장치를 마련해 둔 것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게다가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큰 돌 사이에 손톱만 한 흰색의 대리석 돌은 캄캄한 저녁달이 비치면 빛을 반사해 가로등 역할을 하도록 특별히 고안된 아이디어였다. 많은 고고학적 성과로 폼페이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상당 부분 밝혀지면서 가이드들은 방대한 지식을 풀어놓느라 분주했다.
사람들의 발길 따라 걷다 보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초집중해서 설명을 듣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비밀은 바닥에 있다. 대놓고 흥등가를 광고할 수 없으니 표지판에 살짝 숨겨놨다고 하는데 이게 숨겨놓은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폼페이는 성적으로 타락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문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상수도 시설이 완벽했던 폼페이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수도관의 소재가 납이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납중독으로 인한 정신질환으로 인해 성적으로 문란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일부 학자들의 의견은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여하튼 저 표식을 따라가면 홍등가가 나오는데 홍등가로 상용됐던 집들을 관람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시간이 없어 바로 메인광장으로 향했다.
폼페이의 중앙인 메인광장은 '포럼'으로 도시의 모든 관광서들이 이곳에 다 모여있는 번화가 중의 최고 번화가였던 곳이다. 바실리카(재판정), 시의회, 제우스 신전, 아폴로 신전을 비롯해 시장 등 공공화장실, 공중목욕탕, 매점, 식당 등 다양한 곳들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사라진 도시 폼페이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포럼에 서면 제우스 신전 뒤로 보이는 산이 바로 베수비오 화산이었다. 베수비오 화산은 현재도 활동 중인 유일에서 유일한 활화산인데 실시간으로 분화 징후를 관측하고 있다고 한다.
폼페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기분이 이상하리만치 묘했다.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로마지만 로마에서 전혀 느끼지 못했던 시간의 공간감이 폼페이에서는 피부로 너무 와닿았다. ;폼페이 최후의 날;을 다룬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많지만 솔직히 제대로 본 적은 없었기에 딱히 정보가 없는 나였지만 그럼에도 포럼에 섰을 때 베수비오 화산으로부터 불구덩이가 날아오는 모습이 절로 상상이 됐다.
단순히 폐허로 사라진 도시의 모습이 궁금했던 나로서는 과연 내가 폼페이에 기대한 건 무엇이었을까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가장 비극적인 상태 그대로 박재돼 버린 이 도시가 화산재에 묻히지 않고 그대로 남았더라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다면 모르긴 몰라도 이탈리아 여느 소도시 중 하나로 어쩌면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팀들과 달리 우리 투어는 도심 안에 출토된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곳은 가지 않았기에 다소 서운했다. 그랬는데 출구 쪽에 박물관이 있어 들어갔다. 다양한 출토 유물 중 가장 끔찍했던 것은 화산폭발 당시 처참한 광경이 그대로 정지된 채로 남은 모습이었다. 죽는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배를 땅 쪽으로 향하고 있는 임산부, 두 손 꼭 잡고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연인들, 갓난아이들까지 비극의 순간에서 그대로 멈춘 도시는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방대한 면적의 폼페이는 내가 보는 기준이라면 아무리 빨리 본다고 해도 반나절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곳이었다. 보고 싶은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았는데 투어로 방문하게 되니 시간에 쫓겨 메인 도로 2곳 정도만 봤는데도 벌써 점심이었기에 더 많은 시간을 머물 수는 없었다. 비극이 남겨놓은 찬란한 문화유산을 반에 반도 보지 못한 채 돌아서기가 너무 아쉬웠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나폴리에서 기차 타고 폼페이를 다시 와볼 날이 있기를 바라며 폼페이를 떠났다.
폼페이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무거워진 마음은 푸른 지중해를 벗 삼아 달리다 보니 가라앉은 기분이 조금씩 달아난다. 아말피 코스트가 부리는 마술이었다. 아말피 코스트에서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모든 투어팀들이 무조건 사진을 찍기 위해 무조건 멈춘다는 쏘렌토 전망대다. 쏘렌토는 괴테와 니체에게 영감을 준 도시로 알려져 있는데 도시는 들어가지 않는 대신 쏘렌토 전망대에 서서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파란 하늘보다 더 파란 바다'라는 문구로 유혹하고 있는 쏘렌토 전망대는 빈말은 아니었다. 투어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은 자유여행으로 로마에 와서 일일투어로 이탈리아 남부투어를 신청한 사람들이었다.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지중해 푸른 색깔에 그들은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고 파란 하늘보다 더 파란 바다에 열광했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몰타 세인트줄리안의 집에서 매일 이런 바다를 보면서 5개월 남짓을 지내다 보니 내겐 큰 감흥이 없었다. 오후 시간이 돼서 그런지 오히려 몰타 투명한 에메랄드 빛보다 오히려 빛바랜 느낌이랄까. 새삼 몰타에서 살았던 집이 그리워졌지만 앞으로 한 달 뒤면 다시 몰타로 돌아갈 예정이니 조금만 그리워하기로 했다.
쏘렌토 전망대를 지나 쏘렌토와 나폴리를 벗어나면 본격적으로 절벽을 옆에 끼고 구불구불 S자 도로가 이어진다. 아말피(Amalfi) 해안은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한 소렌토(Sorrento), 포지타노(Positano), 프라이아노(praiano), 아말피(Amalfi), 라벨로(Ravello), 살레르노(Salerno)를 잇는 해안선으로 약 80km에 달한다. 전망도 좋은데 날씨까지 끝내주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아말피 코스트'는 그런 곳이었다. 드라이브 삼아 달리다 보면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낭만적인 분위기가 절로 조성되는 그야말로 로맨틱 가드였다.
아말피 코스트는 BBC에서 죽기 전에 가봐야 할 50곳 중 1위에 뽑혔다고 하는데 사실, BBC가 선정해 놓은 곳이 좀 많아야지. 하지만 아말피 코스트는 나중에 자동차 여행으로 꼭 한번 다시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지긴 했다. 아말피 코스트는 지중해를 따라 무려 50km나 이어지는 길로 절벽을 돌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은 가히 압권이었다.... 고 나도 적고 싶었으나.... 지중해 한가운데 위치한 몰타에 살아봤다는 이유로 감흥이 반감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말피 해안도로에서 포지타노까지 도로가 연결되지만 포지타노는 주민들 외에는 차량 진입이 되지 않는다. 대신 포지타노 입구까지 전용차량을 이용해야 한다. 포지타노 마을까지 운행하는 버스는 따로 시간이 정해진 건 아니고 사람이 타면 바로바로 출발하는 시스템이었다. 11월은 성수기가 아니어서 그런지 사람도 별로 없고 어 버스도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차도 막히지 않아 한가로웠다. 자유여행이 아니니 이것저것 신경 쓸 필요가 없어 폼페이에서 시간이 짧았던 투어의 단점은 완벽한 장점이 됐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마을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는데 버스를 타고도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을 달려 포지타노 입구에 도착했다. 포지타노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는 작은 어촌마을로 아말피 코스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했다. 포지타노를 설명하는 문구를 보면 하나같이 '해안 절벽을 따라 자리 잡은 집들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낭만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라고 적고 있는데 도착하고 보니 멋진 풍경이긴 했다.
하지만, 절벽마을이라는 낭만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으니 버스를 세워지는 지점이 굉장히 높은 고지대라는 사실이다. 버스가 내린 곳에서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 바다가 있는데 바다를 보기 위해 한참을 걸어내려 갔다가 다시 버스를 타기 위해서 절벽을 따라 걸어 올라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경사가 있긴 해도 볼거리가 많아서 생각보다 힘들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곳의 특산품이 상큼한 레몬이라 선물로 줄 레몬와인과 레몬 사탕을 하나 사고 바다에 도착했다. 겨울로 향해가는 포지타노의 바다는 다소 쓸쓸한 느낌이 맴도는 감이 없지 않았으나 차라리 이렇게 한적한 바다가 오히려 나는 더 좋았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바다까지 천천히 걸으며 내려가는 동안 여름 성수기 때 이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일지 상상이 되고도 남았다.
바닷가에서 그림을 그리는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림 그리는 모습을 봐도 괜찮겠냐는 나의 말에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물감을 툭툭 캔버스에 연신 올리면서도 할아버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포지타노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는 할아버지는 포지타노를 떠날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답답하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평생을 한 번도 같은 날이 없었다'는 현답이 돌아왔다.
평생을 한 번도 이곳을 떠나보지 않은 사람이 느낄 답답함 따위는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것인가. 그림을 한 번도 배워보지 않았다는 할아버지의 캔버스에는 자신이 평생이 보고 느낀 포지타노가 그려지고 있었다. 아무리 위대한 화가가 포지타노를 그린다고 한들, 할아버지가 포지타노에 느끼는 애정만 할까. 할아버지에게 포지타노는 그런 곳이었다.
이곳에서 자유시간 2시간이 주어질 때는 꽤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을에서 바다까지 왕복해야 하는 길이 꽤 멀었고 바닷가 구경 좀 하고 카페에 들러 음료 한 잔 하고 쉬다 보니 생각보다 2시간이 금방 흘렀다. 지금도 결코 2시간이 짧은 시간은 아닌데 여름에는 자유시간에 수영을 하게 되면 시간이 더 짧게 느껴질 것 같았다.
세계문와유산이라는 포지타노지만 솔직히 말하면 몰타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인해 포지타노 역시 그다지 큰 감흥은 없었다. 지중해 한가운데 작은 한 점에 불과한 몰타가 얼마나 힘이 센 곳인지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도로에서 느낄 줄 생각도 못했다. 그래도 죽기 전에 가봐야 한다는 곳을 와 봤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다만, 기회가 된다면 아말피 해안도로를 트레킹 하며 마을마을 전부 돌아보면 좀 더 색다른 여행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 느낌이 없었다면서도 떠나려니 뭔가 아쉬운 마음은 여행이 주는 딜레마인 듯하다.
여행의 피로감은 숙면과 함께 다시 로마로 돌아가는 길, 자다 깨다를 반복 하다 보니 눈앞에는 로마 랜드마크가 모두 새겨진 전광판이 펼쳐졌다. 로마를 떠나 하루 동안의 강행군이었지만 충분히 괜찮았다.
+ 다음이야기 : 걷기 좋은 도시, 피렌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