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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가을 끝자락을 붙들고

의외로 단풍이 귀한 제주

by 여행작가 정해경


제주 가을 끝자락을 붙들고


지난 11월 18일 한라산에 첫눈이 내렸다. 작년보다 9일이 빠른 첫눈이었고 1100 고지와 한라산에 눈이 내린 풍경이 SNS를 통해 연일 올라왔다. 하지만 한라산에 첫눈이 내렸다고 해도 낮 기온은 여전히 15도 안팎이었다. 서울처럼 겨울이 성큼 다가온 느낌은 없었고, 밤이 되어서야 조금 쌀쌀하다고 느껴지는 정도였다. 그러던 제주도 이번 주 들어 아침·저녁으로 체감온도가 10도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가을 끝자락으로 접어들었다. 기온도 조금씩 떨어지니 반팔에서 긴팔로, 그리고 외투까지 꺼내 입었다. 올해는 10월 중순까지 이어진 늦더위 때문에 원래도 짧은 제주의 가을이 더욱 짧게 느껴지는 제주의 첫 해다.


11월 초에 울산을 다녀왔다. 울산 공항 근처 도심 가로수들이 온통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게 너무 이상했다. 제주에서 온통 초록만 보던 눈에 울긋불긋한 색감에 눈이 적응을 이 들어오니 오히려 눈이 적응을 못하는 느낌이랄까. 가을이 이렇게 선명했나 싶었다. 이미 완연한 가을이었지만 내가 계절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걸 제주를 벗어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아, 그렇지. 육지의 가을은 도심 전체가 화려하게 변하는 계절이지. 하지만 제주에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도심도, 숲도, 대부분 난대성 상록수가 자리하고 있어 일 년 내내 거의 변하지 않는 초록이 제주를 감싸고 있다. 제주로 이사한 지 고작 4개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주의 색에 어느새 스며들어 있었다. 제주에서 단풍을 보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살아보니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새삼스러웠다. 어쩌면 입도 첫 해라 유독 더 크게 다가온 것도 있을 것이다.


제주 시내의 초록이 힘을 발하는 건 겨울이겠지


제주에 단풍이 적다는 건 한라산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일지도 모른다. 본디 단풍이라는 것이 일교차가 크고 대략 대략 5~10℃ 전후로 떨어지는 시기에 색이 선명하게 물드는 법이다. 제주는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가을에도 기온이 높고 일교차가 적어서 단풍나무가 있어도 육지에서만큼 단풍이 들지 않는다. 실제로 곶자왈에 단풍나무가 있지만 11월 말이 되어도 여전히 5월의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제주에서 제대로 단풍을 보려면 1100 고지 이상의 한라산 수목대를 찾아가야 한다. 하지만 단풍나무가 자체가 많지도 않거니와 제주 기후 특성상 가을에도 바람이 강한 날이 많고 비와 안개가 잦아 단풍이 제대로 물이 들기 전에 떨어지기 일쑤다. 같은 이유로 육지보다 단풍이 오래가지 않는다. 게다가 올해는 유난히 늦더위가 심해 단풍이 곱게 물들지도 못했다. 육지처럼 산 전체가 붉게 빨갛게 물드는 모습은 보기 힘들고 단풍을 볼 수 있는 기간도 매우 짧다. 그러니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단풍은 제주에서 매우 귀할 수밖에 없다.

단풍나무에 단풍이 잘 들지 않는 곶자왈


그렇다고 제주에 단풍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흔치 않을 뿐. 그래서 몇 안 되는 단풍 명소나 은행나무 명소는 도민들에게도 관광객들에게도 늘 인기다. 제주 사람들도 '거기 은행나무 물 들었다니'ㄹ며 종종 묻기도 한다.


입도 첫 해인만큼 단풍으로 유명하다는 곳 중 몇 군데를 다녀왔다.


단풍이 가장 예쁠 때 천아숲길을 다녀왔다. 눈이 일찍 떠진 평일 아침, 갑자기 산책이 하고 싶었고 천아숲길까지 차로 20분이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제주에서 귀한 단풍이니만큼'천아숲길'은 제주 가을 단연코 최고의 명소다. 몇 해 전 가을 여행자로 천아숲길이 있는 한라산 둘레길도 걸었고, 가을 단풍을 보기 위해 관음사로 한라산을 오르기도 했었다. 제주에 살게 되니 평일 이른 아침에 찾아간 천아숲길은 기분이 남달랐다.


제주 단풍 1번지 천아숲길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천아숲길이건만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바스락 떨어지고, 그 소리에 맞추기라도 한 듯 새들이 동시에 울어댄다. 컬러풀한 수 속에 들어앉아 있으니, 색색의 나뭇잎들이 서로 수다를 떠는 듯 파르르 떨린다. 잠시나마 가을 한가운데 한참 동안 머물다 왔다.

기념 사진 한 장 찰칵!


천아숲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천왕사'도 제주 가을 명소다. 천왕사는 한라산 기슭, 아흔아홉골(九九谷)로 불리는 여러 골짜기 중 하나인 금봉곡 아래에 자리한다. 크지 않은 사찰이지만 사찰 주변으로 온통 단풍이 드는데 이곳의 단풍은 유독 곱고 선명하다. 게다가 사찰 입구까지 차로 갈 수 있으니 접근성도 좋다.


천왕사 단풍이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기에 기대가 됐다. 본당 입구에 주차를 해도 되지만 국립호국원을 지나 천왕사 입구 비석이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키 큰 나무가 늘어선 도로를 따라 걸으니 쏟아지는 햇빛과 함께 초록 속에서 붉고 노란 잎들이 초록색을 비집고 얼굴을 내민다. 나는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오후 3시. 한라산 골짜기가 그늘로 덮이기 직전의 부드러운 햇살이 단풍의 고운 색을 아련하게 어루만진다.


북한산만 가도 흔하디 흔한 가을 풍경이지만 제주에서는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풍경이다. 그래서일까. 짧은 가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굵고 짧게 즐길 수 있는 천왕사 단풍


제주에도 은행나무가 몇 군데 있지만 제주시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제주대학교 교수아파트의 은행나무다. 서울이라면 이미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이 들어서 절정을 맞을 11월 중순에도 제주대학교 은행나무는 아직 푸르다. 지대가 높다 보니 단풍 시기가 다른 곳보다 더 늦다. 작년에는 12월 초에 절정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노랗게 다 물들면 가 볼 생각이었는데 예년보다 일찍 한라산에 눈이 내리고 며칠간 이어진 비바람에 노랗게 되기도 전에 1/3이나 떨어졌다고 한다... 에잇. 내년에 다시 가봐야겠다.

11월 중순인데도 여전히 푸른 은행나무


단풍이 귀한 제주에서는 도심에서 단풍을 보기가 어려운데 내 집 앞을 보며 또 놀랐다. 여름에는 온통 초록이었던 대로가 어느 날부터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했다. 다른 도로는 대부분 팽나무 등 상록수인데 이 도로만 노랗고 빨간 활엽수다. 짐작컨대 느티나무가 아닐까 싶다. 제주에 오래 산 사람에겐 대수롭지 않은 풍경일지 몰라도 내 눈에는 유난히 신기하고 귀하게 보인다. 매일 루프트탑에 올라 하루하루 물들어가는 도심을 바라보는 보는 즐거움이 하나 더 생겼다.

여름에 푸른 색이었는데 가을이 되니 낙엽으로 물든 대로변
대부분 초록인데 이 대로변은 낙엽수



마지막으로, 육지에서는 존재감이 크지 않지만 제주에서는 오히려 자주 볼 수 있는 단풍이 있으니 바로 벚나무다.


벚나무도 단풍이 들지만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후두둑 떨어져 단풍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나무다. 그래서 육지에서는 '벚나무에 단풍이 있나?'라고 넘기기 쉽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다르다. 붉게 물든 벚나무 잎이 의외로 오래 버티고 있어 덕분에 단풍이 귀한 제주에서 한동안 가을의 붉음을 즐길 수 있다. 알다시피 제주 곳곳에 벚나무가 많은 것도 한몫한다.

벚나무 붉은 단풍이 얼마나 예쁜지


입도 첫 해라 '단풍'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주에서 나의 첫 번째 가을은 이렇게 지나간다.

내년 가을, 제주는 또 어떤 새로움을 내게 안겨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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