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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미리 May 19. 2020

1 # 퇴사에는 용기와 이유가 필요해

스물여섯, 다시 백수가 되었다.

사실 나는 취업을 준비하는 '취준'기간이 길지 않았다.

4학년 1학기를 마친 여름방학, 학교와 연계된 작은 홍보대행사에서 인턴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2달 간의 인턴생활을 마친 후 나는 정규직으로 고용되었다. 언젠가 학교에서 진행한 모의 면접에서 면접관이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무지개라는 회사가 남색이 없는 경우, 니가 아무리 예쁜 빨강이어도 당신을 뽑지 않아요. 적당한 남색을 뽑지. 그게 바로 회사가 찾는 핏(Fit)인 거겠죠.


전 구성원이 4명이었던 작은 회사에서 나는 모의 면접관이 말한 '적당한 남색'의 역할로 첫 회사를 시작했다. 총 근무 기간은 1년 8개월, 많은 것을 배웠다. 홍보의 '홍'자도 모르던 내가 일에 익숙해지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나름대로 능숙한 배테랑인 척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내가 근무하던 회사는 매우 작았다. 그 말은 '한 사람이 곧 한 부서'로 일을 해 왔다는 뜻이다. 자연스럽게 커버해야 하는 영역이 넓어지게 된다. 기획자에서 디자이너,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일부터 블로그 에디터까지. 클라이언트와 소통하고 무언가를 만들어가야 하는 일은 어렵지만 나름대로 즐거웠다.


그랬던 내가 퇴사를 생각하게 된 건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 작은 회사 규모로 인한 공부의 문제. 가장 먼저 내게 문제로 다가온 것은 정말 단순했다. '물어볼 사람이 없어!' 이건 작은 회사를 다니고 있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처음에는 인터넷을 찾아보고 마케팅 강의도 들어보면서 나름의 공부를 진행해 왔지만, 커버해야 할 영역이 넓어지니 공부는 커녕 일을 쳐내기도 바빴다.


두번째, 예산의 문제. 한 사람이 여러 클라이언트를 관리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큰 예산을 운용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A/B테스트나 광고 효과를 분석하기에 앞서 클라이언트에게 SNS 광고에 대해 설명하고 예산을 따 오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한달에 10만원 남짓한 돈으로 퍼포먼스를 체크하다보니, 도대체 유의미한 데이터가 맞는 것인지 스스로도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웠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에서 위안을 삼고, 이를 보고서로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일주일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세번째, 발전의 문제. 이건 정말 간단하다. 내 스스로 일을 함에 있어서 발전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몇일을 야근을 하면서 제출했던 제안서를 다음 날 아침 대표님의 방식대로 고쳐져 있을 때, 가장 큰 현타가 왔던 것 같다.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동안 경쟁PT를 한번도 성공한 적 없다는 것에서 말모말모..(회사의 모든 PT는 대표님이 단독으로 진행했다. 내 제안서는 매일 밤마다 바뀌어 있어서, 원본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네번째, 보험의 문제. 음. 회사에서는 주 40시간 근무를 하는 근무자에게 4대보험을 가입해주고, 보험료를 납부해야 한다. 나의 경우, 가입은 정확히 되어 있는데 납부가 하나도 되지 않았다. 입사 한달 후 집으로 통지서가 날아왔고 대표님께 충분히 전달했으니 완벽히 처리가 된 줄 알고 있었다. 4개월 쯤 후였나. 국민연금을 확인해보니 미납. 다시 한번 회사에 이야기를 했고 내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실제로 납부했던 내역서를 보여주기도 해서 '곧 내겠지'하고 넘겼다. 하지만, 결과는 '아니'. 퇴사 한달 전, 보험공단에 연락해보니 내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나의 입사 전부터 미뤄져 있던 보험료를 내고 있는 것이며, 아직 내가 입사한 달의 보험료가 처리되기에는 몇 달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위의 일이 있고 다음날, 나는 퇴사를 이야기했다. 4주의 인수인계 기간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겠노라고. 이야기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믿고 근무했던 회사에 대한 배신감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하는 회사의 입장에 크게 실망했다.


그렇게 3월, 스물여섯의 나는 드디어 백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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