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미리 Mar 03. 2021

천재 어린이의 이야기

2년 정도 천재로 살아보았습니다.


전 아마 천재였습니다. 그러니까, 6살 때까지는요.


모든 게 빨랐습니다. 돌잡이를 할 때는 종종 뛰어다녀 잡으러 다녀야 했고, 두 살때는 이미 말을 했다나요. 심지어 알파벳도 알았다고 하네요.


결정적인 사건은 다섯 살 때입니다. 아직도 기억이 선합니다. 두 살에 말을 한 천재 딸내미를 둔 천재 엄마는 만화영화 대신 영어 비디오를 틀어 두었습니다. 뭐, 기억에는 영어로 노래가 나오곤 했어요. 사건의 발단은 여기서부터 입니다. 인어공주의 ‘under the sea’. 저는 천재답게, 그 노래를 따라 불렀던 건데요. 물론 이해를 하고 부르는 건 아니었습니다.


트로트 영재들이 미스 트롯에 나오는 지금과는 달리, 그땐 이 정도로도 천재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시기가 절묘했죠.


천재 엄마는 외쳤습니다.


“어머나! 우리 딸이 정말 천재인가 봐!”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태교를 위해 사놨던 책 한 권이 있었죠.


출처 : 네이버 책


바로, 이 요망한 책입니다. 엄마가 정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제목에 이끌렸다는 데에 저의 천재성을 걸겠습니다.


그 뒤로 저의 삶은 팍팍한 닭가슴살같이 변했습니다. 은물이라던지 뇌호흡같은 창의력을 키워주는 (그러니까 겉으로는 티가 전혀 나지 않는) 비싸고 멋진 수업들을 줄줄이 듣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집안의 기둥뿌리를 뽑아 천재 딸내미에게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안타까운 건, 제가 무척 평범한 어린이였다는 데 있습니다. 대부분의 애들은 ‘재미없는 것’과 ‘하기 싫은 것’에 깊은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집중도 하지 못하죠.


천재 엄마의 판단 하에 재미없고 하기 싫은 많은 것들을 하게 된 천재 딸내미는 금세 산만하고 집중력 없는 아이가 되어 갔습니다.


유치원에서도 말했습니다.


‘적응력이 뛰어나고 활발하네요, 어머니’


물론 좋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너무나 우수한 어린이라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천재 엄마도 현실의 쓴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천재로 사는 삶은 2년 만에 끝을 맺었습니다. 아마도 집이 조금만 더 부유했더라면 필리핀 어학연수 길에 올랐겠지만,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죠.


엄마는 아마 몰랐을 겁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기 때문이겠죠. 누구든 잘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니까요. 중요한 건, 천재 딸내미가 아닌 안 천재 딸내미도 사랑할 준비가 돼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천재는 엄마라고 생각했습니다.


엄마가 돼보는 건 처음일 텐데도 딸내미가 천재든, 천재가 아니든 똑같이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은 이미 준비가 돼 있더라니까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그렇게 능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타고난 천재가 분명합니다. 천재 엄마를 둔 덕에 사랑으로 무럭무럭 쑥쑥 자라날 수 있었으니, 저는 ‘복 받은 안 천재’ 정도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거겠죠.


요즘에는 많은 뉴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 안에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처음을 맞이하는 많은 사람들의 소식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조금 더 많은 천재 엄마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랑은 유산처럼 내려오니, 그 천재성도 유산처럼 내려오게 되려나요?


어쨌든, 저는 잠자고 있는 저의 천재성이 언젠가는 증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떤 방법이 던 간에요!



매거진의 이전글 이만하면 됐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