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 3시간. 길바닥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 집을 구하기로 했다. 부동산에 가서 내가 원하는 매물이 있는지 확인하고 계약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현실은 녹녹치 않다. 처음 소개받은 집에 들어갔을 때부터 난 느꼈다. 연식이 잔뜩 느껴지는 인테리어와 (aka꽃무늬 벽지) 좁아터진 화장실을 보며 변기에 앉아서 씻는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장실이 괜찮으면 집이 좁고, 집이 넓으면 낡고, 결국 나는 현실과 타협해야 했다.
처음 독립을 꿈꿨을 때는 한강이 보이는 작은 오피스텔(지금 기준으로는 대궐만한)에 커피머신과 침대를 두고 브런치를 먹는 나를 상상하곤 했다. 지금은 그게 다 꿈이라는 걸 안다. 내가 가진 예산에서 한강은 턱도 없을 뿐더러, 한강이 보이지 않는 오피스텔도 꿈꾸기 어려웠다.
그럭저럭 타협할 점들을 정리해, 가계약을 시작했다. 가계약을 하고 나니 대출이 안나오면 어떡하지? 더 좋은 집이 찾아오면 어떡하지? 내가 멍청하게 확인해야 할 부분을 확인하지 못한거면 어떡하지? 하는 어떡하지 물음표 속에서 걱정만 늘어났다.
걱정 반 설렘 반이 섞인 내 전화를 받은 아빠는 “그게 그냥 니 운명이야”라고 말했다. 그래, 좋은 집이 좋은 시기에 오는 것도 내 운명이구나. 욕심 넘치게 타협하지 않고 사는 건 역시 돈이 많아야 할 수 있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아빠는 처음부터 똑똑하게 집을 볼 수 있었을까? 임신한 엄마, 늙은 노모와 곧 태어날 딸과 함께 살 집을 알아보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고작 한명 누울 곳을 찾는 나도 일주일을 고민하고 10개가 넘는 방을 뒤적거리지 않았나. 발품이 아니라 손품을 판 곳을 세자면 다 세지도 못할 정도다.
어른이 되기에 나는 아직도 멀었다. 유연한 척, 태연한 척, 똑똑한 척 집을 고르는 눈도 없을 뿐더러 식구와 함께 살아야 하는 부담을 짊어질 근육도 모자라다. 아빠는 도대체 얼마나 질긴 근육을 타고 났기에 그 많은 일을 척척해냈나 궁금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는 것들을 거뜬히 해 내는 사람의 배포는 내게는 없는 것 같다.
문득 근육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팔과 허리, 목과 배까지 빤빤하고 튼튼한 근육을 키워야겠다고. 내일은 환승지에서 걸어가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다. 조금 더 질긴 마음으로 빤빤한 근육을 키우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