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미리 Apr 21. 2021

월요병보다 무서운 일요병

이건 여행이 아니라 출근이라구요

“지금 들어오는 열차는 8시 11분 서울로 출발하는 1218호 열차입니다.”


열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우렁차다. 고데기로 얌전히 정리한 앞머리가 사정없이 휘날렸다. 가장 중요한 타이밍이다. 열차카페가 있는 4호차의 문이 열리는 자리에 정확히 서지 않으면 꼼짝없이 30분을 서서 가야 한다. 잘만 하면 운 좋게 입석 자리에 앉거나, 등을 기댈 수 있는 벽에 앉아 갈 수 있다. 이 기회를 잘 포착해야 마무리하지 못한 화장을 하거나 꾸벅꾸벅 졸 수 있다.


내 출근길은 말하자면 환승의 연속이었다. 버스를 타고 기차역까지 간 다음,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간 다음, 1호선과 2호선을 넘나들어야만 회사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출퇴근에만 하루에 만 원을 소비할 수 있다. 그때 내 월급은 150만 원이었으므로, 출퇴근에 20만 원을 지출하고 나면 결국 130만 원 정도를 번 셈이다. 물론 1년 뒤에는 교통비 정도는 더 벌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출퇴근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 다만 함께 8시 11분 기차를 타는 사람들에게 깊은 내적 친밀감을 쌓았다. 우리는 이름도 모르고 말도 한 번 해본 적 없지만 혈연, 지연, 학연보다 강력한 기연(기차 인연)을 갖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매일 같은 시간, 매일 같은 칸에 타는 사람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여느 때와 같이 출근한 회사에서의 점심시간, 나의 버라이어티한 출퇴근 이야기를 듣던 대리님이 말했다.

“해미리 씨는 매일 여행하는 기분이겠어요.”

“여행이라뇨! 전투를 하러 간다면 모를까.”


그렇다. 비틀거릴 틈도 없어 손잡이를 잡을 필요도 없을 정도의 만원 지하철에서 서로의 땀을 묻혀가며 각자의 밥벌이장으로 떠나는 이 건 말 그대로 전투다.

이런 생활을 1년쯤 반복했을 때 나는 결국 ‘일요병’에 걸리고 말았다. 일요병은 월요병의 합병증같은 존재인데, 일요일 밤 침대에 누우면 절대로 잠이 오지 않는 병이다. 주말은 너무 짧아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 생기곤 한다. 파릇거리는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개콘병’으로 부르곤 했는데, 개콘병이 감기라면 일요병은 TOP다. 지독한 놈.


일요병을 이기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최악이었다. 자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월요일의 나에게 맡겨버리는 방법이다. 조삼모사같은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방법을 고치지 못했는데, 시험 기간에 하는 모든 일이 재밌는 것처럼 이 시간의 유튜브와 웹툰은 세상에서 제일 재밌었기 때문이다. 결국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새벽에 잠에 들면 악몽을 꾸곤 한다. 정확히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매일 아침 6시 반이면 나는 땀을 흘리며 깨어나니까 대충 악몽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꿈과 현실은 매일 반대다. 기차가 모두 여행이 아닌 것과 똑같다. 내가 청개구리같은 사람이여서가 아니라 정말이다.

플랫폼에 서기만 해도 기분 좋았던 기차를 매일 타면서도 하나도 설레지 않고, 꿈꿨던 직업을 갖게 됐는데(급여는 매우 적었지만-이런 급여는 꿈에 없던 내용이다) 또 다른 꿈을 꾸게 되는 건 도대체 왜 그런걸까? 아 몰라, 이런 생각도 다 일요병의 잔재다. 벌써 4호차 사람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똑똑이가 되고 싶을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