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를 모르고, 너는 나를 더 모른다.
친구들과 '첫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정말 첫인상이랑 다른 것 같애."
"그래? 어떤 면에서?"
나는 물었고 친구는 대답했다.
"처음에는 진짜 무섭게 생겼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친해지기 어렵겠다고. 근데 꼭 그렇지는 않더라!"
아 정말? 하고 되물으며 꽤 많은 생각이 들었더랬다. 왜냐면 나는 스스로 순하게 생겨서 진입장벽이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무섭게 생겼다니. 곧바로 나는 항변했다.
"그럼, 지금은 어때? 친근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해주면 좋겠어."
"그래? 앞으로 하는거 봐서!"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그저 그런 일상의 대화 속에는 나를 담고 있는 세상의 여러 면을 만날 수 있다. 알고 지낸지 3년이 넘은 친구와 첫인상에 대한 대화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비쳐지고 싶은지에 대한 고찰을 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 어떤 사람일까. 적어도 첫인상이 무섭게 보이지는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겠지. 아니면 ‘친근함과 다정함’을 바라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점이다. 기왕이면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대로 보였으면 한다는 바람도 섞어서.
나를 아무렇게나 정의하는 시선에 예민해진 건, 아마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이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꽤 특이해서 입학 후 반이 바뀌는 일이 없었다. 함께 입학한 친구들과 삼년간 부딪혀야 한다는 뜻이다. 작지만 매서운 그 세계에서는 제멋대로 정의되고, 그 정의대로 평가받고, 평가는 비난이 되기 십상이다. 어리지만 줏대있는 예민함을 가진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꽤 오랜 시간 방황했다. 나는 지금도 그 때를 '우물 안의 개구리들의 정치판'과 같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관찰해 정당을 만들고, 무소속이 된 사람의 의견은 별 것 아닌게 되거나, 아니면 뒷담화의 대상이 되는 형태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모습이 ‘가벼운 사람’으로, 어색함에 꾸준히 말을 거는 모습이 ‘경솔한 사람’이 된다. 한번 정의된 인상은 고스란히 3년의 평가로 이어진다. 서로를 평가하고, 관찰하는 아이들은 더욱 더 예민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글을 썼다. 글쓰기를 할 때만큼은 누구를 평가하거나 관찰하지 않아도 되었다.
순간의 비난이 만드는 평생의 흉터는 제멋대로 썩는다. 매일을 힘겹게 갈아온 마음의 밭에 든 재해는 농부의 잘못이 아니다.
그 시기에 적었던 문장들은 거의 대부분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비난에 익숙하지 않은 청소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는 '그건 그냥 자연재해 같은 거야.'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했던 이유는 '가장 솔직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친근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무서운 사람이며, 예민한 사람이지만 무딘 사람인 나를 모두 말할 수 있다. 무수한 나의 페르소나를 인정하게 된 그 순간부터, 사람의 다양성에 대해 고민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내가 여기에 있듯, 그 누군가도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그 인정. 다양성에 대한 평가 없는 삶을, 나는 글 속에서 본 것도 같다.
사람들과 실타래처럼 얽혀 살아가야 하는 삶. 우리는 때때로 '어떤 사람'이고 싶은 사람인 척 하거나 '어떤 사람'이 되기를 강요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더럽게 다중적이고 다양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진짜 욕망을 위해 스스로를 작은 조각으로 쪼개거나, 새로운 조각을 만들며 지낸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바보라고 말하는 셈이다.
나도 나를 모르고, 너는 나를 더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다중성을 통해 뻗어나간 관계적인 페르소나는 성실하게 제 할일을 한다. 그리곤 곧 우리는 서로에게 '정의'된다. 스스로 만들어낸 모습으로, 혹은 타인을 보는 나의 시선 속에서.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일 때도 있고, 나도 모르는 나일 때도 있겠다.
봄에는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초록잎이 우거지고, 가을에는 단풍이 들고, 겨울에 잎을 떨어트려도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꽃을 피우고, 잎이 붉게 물들어도 나무는 나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다중성 속에서 우리는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있으니 어쩌면 다행이다. 계절같은 사람들 속에서 옷 차림을 바꿔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언젠가 누군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저는 000구요. 저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것을 찾아가는 여정과 고민의 시간을 좋아하구요. 그래서인지 아직 저를 다 알지는 못한답니다. 그렇지만 덕분에 뭐든지 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해요. 앞으로 스스로를 잘 정의하되 새로운 나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곤 슬그머니 덧붙이겠지. 그래서, 매일 스스로에 대해 고민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