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사는 건 정말이지 어렵다
나는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프로 통근러였다. 첫 출근을 하던 주에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아, 정말 부지런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겨우 일어나 귀에 이어폰을 꼽고 지하철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 시간, 나 역시 부지런한 현대 사회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더랬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알람이 울리면 생각할 새 없이 출근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너무 많고 너무 바쁜 사람들과 함께 지하철을 탄다. 의지대로 걸어가고 있는 건지 인식하기도 전에 발은 충실하게 출근길을 걸었다. 몇 시간에 걸친 출퇴근 시간 덕에 회사에 도착하면 지치고, 지친 상태로 일을 하고,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지하철을 타야 하는 시간을 가늠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곤 했다. 시간과 돈을 길에 버리면서 열심히 일하는 나에게 남은 건 '피곤' 뿐이다.
이런 생활이 일 년쯤 지나자 나 혼자 산다에서 장도연이 했던 말처럼,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살아 가는 데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에 화딱지가 났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쓰지 못하는 것에 답답했던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다 잘하는 제너럴리스트가 되거나, 하나라도 잘하는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나는 잘하고 싶은 것을 찾을 에너지를 이 길 위에 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 뒤로는 아주 부지런히 에너지를 쏟을 곳을 찾았다. 요즘 많이 한다는 직장인 모임도 가져보고, 영어 회화 스터디도 해보고, 부지런히 글도 썼다. 그 무엇도 안 하고 집에 돌아온 날에는 맥주 한 캔을 따고 넷플릭스를 봤다. 조금이라도 내 시간을 챙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날에는 밤새 잠을 뒤척이고 괜히 핸드폰을 껐다 켜며 전자책을 읽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 결과 나는 더 피곤했으며,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은 내가 매우 '잘 살고 있다'라고 생각했다. 긴 통근 시간에도 또 다른 자기 계발을 찾는 이 세대의 참된 직장인과 같은 느낌으로. 어쩌면 초반에는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는 매우 지쳐 버렸음에도. 그냥, 열심히 살고 있다는 느낌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 열심히 사는 건 정말이지 어렵다."
밤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노라면 이 생각이 절로 든다. 뭐가 문제였을까?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했을 뿐인데. 습관적인 '문제에 답 찾기'에 익숙한 나의 새벽은 오답으로 가득해진다. 글쎄, 뭐였을까. 왜 그랬을까. 뭐가 문제였을까. 하는 생각들은 생각들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면, 그것들은 하나도 솔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 조금 더 잘 표현하자면 솔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척하기 위해 산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학교생활 12년, 장래희망을 적어 내야 하는 시기가 되면 나는 항상 고민이 많아졌다. 장래희망을 적어내리는 순간, 나는 꼭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 그 덕에 나는 매년 다른 직업을 써냈다. 이 변덕스러움은 취업을 하기 전까지의 나를 만든 원동력이다. 그리고 바쁜 사람들과 함께하는 바쁜 사회에서는 잊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퇴사는 답이 아니다. 정말 그렇다. 척척 다음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 속에 나는 여전히 스물여섯의 백수다. 하지만, 직장인을 그만두고 난 후, 피곤은 조금 미뤄두고 스스로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어쩌면 낮잠과도 같은 시간. 꿈이면 어때, 아무렴 좋다. 조금은 게으른 하품과 함께하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