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 글짓기를 시작하다.
그다지 굴곡진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닌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상하리만치 감정과 상황에 잘 휘둘리는 제멋대로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크게 한 번 건강을 잃었음에도 예민하고 불 같은 성정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아 가끔은 내 스스로 나를 태워먹을 정도였다. 십 년 가까이 사회생활을 하며 싫어도 웃는 낯을 하는 법 정도는 배웠지만 생소한 힘듦을 마주했을 때 다 내던지고 숨는 버릇만큼은 영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밀려오는 부담감에 숨이 막힐 것 같던 어느 날, 나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번 도망쳤다.
작년 봄 호기롭게 퇴사한 이후 내 받은 편지함은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양해해 달라는 탈락 소식으로 채워져 갔다. 때가 있겠거니, 의연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도 어려워졌다. 어지러운 마음에 뒤척이다 해를 보고서야 잠이 들기도 했고 또 어느 밤에는 대상 없는 화가 불쑥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번잡스러운 시간을 한참 보내고 나서야 모든 게 부족한 나를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서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제삼자가 바라보는 내가 그리 매력적인 동료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따라붙는 좌절감을 이겨내기 위해 어떤 액션이 필요했다.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약해진 마음을 털어놓고 하염없이 의지할 수도 있었지만, 더는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이 상황을 한탄하며 소중한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주변에서 취미로 글을 쓰는 건 어떻겠냐고 물을 때마다 바빠 죽겠는데 무슨 소리냐며 흘려 넘기고는 했는데 여유 시간이 생기니 그런 조언들이 괜한 말은 아니지 않았나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작사비라도 아끼자며 직접 써 본 노래 가사, 급박하게 작업해야 했던 백여 장의 스크립트, 어설픈 번역을 참을 수 없어 중한사전을 뒤져가며 매끄럽게 다듬던 시나리오, 좋아하던 프로젝트의 담당자가 되어 신나게 써 내린 카피. 직장생활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때때로 사소한 보람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던 시간들 덕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지나간 나의 시간들을 차근차근 기록해 보려고 한다. 내 인생은 특별히 자극적이지 않은 소소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나름대로 분명한 즐거움이 있었으니까. 치열한 직업인으로서의 자아는 잠시 내려두고 새로운 풍경을 사랑하는 여행자로서의 경험부터 정리해 볼 예정이다. 여행 중에 느낀 감정들이 머릿속에만 머물다 희미해지기 전에 텍스트로 또렷하게 정리하는 법을 배워나가고 싶다.
즐거운 기억들을 다양한 말로 표현하다 보면 언젠가는 싫은 상황도 덤덤한 단어로 풀어나가는 방법도 깨닫게 되리라 믿는다. 그러다 보면 사소한 좌절쯤은 무던하게 받아들이는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미래의 내가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며 2024년 봄, 브런치 첫 글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