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먹는 꽃
그날 밤, 정원엔 바람 한풀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꽃은 조용히 떨리고 있었고,
나는 첫 번째 흉터를 안은 채, 한동안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이전 돌보는 자는 내 맞은편에 다리가 3개뿐인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달빛이 그의 발끝을 스칠 때마다 조금씩 희미해졌다. 마치 해질 무렵의 그림자처럼 그의 몸이 투명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기억의 꽃봉의 가장 아랫잎이 어느 한 부녀의 사진조각이 되어 떨어졌다.
사진을 본 그는 어딘가 평온해 보였지만, 그 눈동자엔 이제껏 본 적 없는 깊은 설움이 담겨 있었다.
돌아와서는 안될 기억의 쓰나미가 덮친 듯 보였다
“당신이 제 흉터를 물었었죠.” 그가 울음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소매를 다시 걷었다.
팔 안쪽에 있던 오래된 흉터는 놀랍게도 누군가의 이름으로 변해있었다.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새미]라고 적혀있는 것 같았다.
“이건… 제 딸의 이름이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무너질 듯했다.
“그녀는 열한 살이었어요. 병이 있었고, 결국… 제가 먼저 아이를 보내야 했죠.”
나는 놀라 숨을 멈췄다.
“ 떠나보낸 뒤, 그 아이의 이름조차 입에 올릴 수 없게 됐어요. 그 아이가 웃던 얼굴을 떠올리면, 같이 있던 내 무력함만 덮쳐왔죠.”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이 정원에 왔습니다. 그 아이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하지만…”
그는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꽃은 그 이름을 거부했어요. 그건 지울 수 있는 기억이 아니었거든요. 너무 순하고, 너무 맑아서… 차라리 그 기억을 지키는 자가 되는 건 어떻냐고 물었죠.”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사랑을 버릴 수 없었고, 그래서 대신 책임 있는 사랑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당신은 그 기억을 떠안고 살아온 겁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보이며
“사랑이 사라진 뒤에도, 그 감정은 어디론가 가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그건 내 팔에 남았고, 이 정원에 남았고, 이젠 결국 당신에게로… 계승된 겁니다.”
나는 그제야 그 흉터의 깊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건 누군가의 이름을 평생 가슴에 묻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선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피어있던 기억의 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당신이 돌보는 자입니다. 이 정원은… 기억의 온도를 유지하는 곳입니다. 누군가는, 이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럼 당신은…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내 기억은 이제 떠납니다. 당신이 그것을 품었으니까. 나는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쪽 다리로 사라져 가는 몸을 이끌고 삐걱거리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돌보는 동안, 누군가는 사랑을 잊고, 누군가는 잃은 감정을 되찾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소서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부디 좋은 기억이길 바랍니다 “
절뚝거리며 달빛을 향해 걸어간 그는 마침내 월광의 일부가 되어 어두운 밤 속으로 사라졌다.
너무나 고요했다. 지나칠 정도로 삭막했다. 그리고 나는 정원 한복판에 홀로 서 있었다.
팔 안쪽의 흉터는 아직 뜨겁게 살아 있었다. 그 흉터 속에는 그의 딸의 이름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고, 잊을 수 없다는 통증이 남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유리병들이 놓인 방으로 향했다. 소서. 그 이름을 다시 꺼내 들기 위해, 나는 병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