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먹는 꽃
6장. 새로운 돌보는 자- 첫 번째 흉터
돌보는 자, 그리고 꽃 한 송이와 함께
어느덧 밤이 내렸다.
정원은 조용했고 빛은 사라진 채 기억을 먹는 꽃
한 송이만 보랏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곧 돌보는 자는
온실의 지하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낡은 호두나무 상자, 손바닥만 한 크기였지만,
그 안엔 오랜 시간이 접혀 들어가 있었다.
그는 마침내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묘한 광택이 도는 작은 유리판 하나가 들어 있었다.
투명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누군가의 숨소리, 낮은 목소리, 웃음의 흔적이
겹겹이 흘러갔다.
그건 기록된 영상도, 사진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기억의 단편 모음집이었다.
“이건 ‘계승의 거울’입니다.” 그가 말했다.
“이 안에는 내가 돌보는 자가 되었던 순간의 기억,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고통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거울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것을 통해 당신의 몸에 첫 번째 기억이 새겨질 겁니다. 그 상처는 제게서 시작되었고, 이제 당신에게로
이어질 겁니다.”
나는 습한 밤공기를 들이마시고 유리판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울임에도 불구하고 내 모습이 보이기는커녕 나무상자의 밑바닥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내 손이 차게 식어갔고,
몸이 물속에 잠기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아니 이건 늪으로 빠지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빠져나오기엔 너무나 깊었고 빠르게 날 빨아드리고 있었다.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 순간 빛이 번졌고 투명한 유리판 안의 무엇인가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정확히는, 내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감정들이
거울을 통해 ‘길’을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타인의 기억이 내 속에서 울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무언가를 놓쳐 울던 아이, 불 꺼진 방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삼키던 사람,
그리고…
어느 늦여름, 비 내리는 정원에서 소서라는 이름을
조용히 흘리던 내가 있었다.
아직 그 기억들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감정만은 선명했다.
고요한 절망. 남겨진 사랑.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
그렇게 드디어 소서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나 싶었지만
팔 안쪽이 뜨거워질 정도로 바로 그곳에 새로운
흉터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치 불꽃이 지나간 듯,
아주 조용한 소리로 살이 갈라졌다.
소리 없는 비명이 내 속에서 천천히 퍼져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여다봤다.
거기엔, 방금 생긴 상처라고 믿기 힘들 만큼 아주 낡고 깊은 상처가 하나 새겨져 있었다.
그 모양, 그 결. 돌보는 자가 전에 보여주었던, 팔 안쪽 가장 큰 흉터와 정확히 같은 위치에.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 상처는 내 것이기도 하고, 그의 것이기도 했다.
이건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시간을 이어받은 표식이었다.
돌보는 자는 조용히 말했다.
“그건 제 안에 가장 오래 있었던 기억입니다.
이제… 당신의 것이기도 하죠.”
그는 내 앞에서 조용히 물러섰다.
“이제부터, 당신이 이 정원과 꽃 그리고 기억들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팔의 상처는 아직 따뜻했다.
그 온기가 사라지기 전까지, 나는 이 기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