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이 불여일견
<샤이닝>. 우리는 이미 이 영화를 잘 알고 있다. 저주받은 장소에 갇히는 주인공 가족. “Here’s Johnny!” 라는 대사와 잭 니콜슨의 연기. ‘All work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라는 속담이 빼곡하게 쓰인 종이. 거울에 비쳐 보면 ‘MURDER’가 되는 단어 ‘REDRUM’. 이미 알려진 장면도 많은데 영화 포스터는 대놓고 스포일러를 한다. 스릴러 영화를 영화를 만든 이와 영화를 읽는 이의 결투장으로 본다면, 관객은 총을 한 자루 더 쥐고 결투에 임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980년도 영화는 2018년의 관객에게 가장 원초적인 공포를 체험시킨다 .
이 영화는 가장 원초적인 사운드와 가장 인공적인 시선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깜짝 놀래키는 음악을 남발하는 공포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는 고주파의 효과음을 은근하게 내보내다가 멈추길 반복한다. 다소 뻔한 수작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의 살갗에는 소름이 돋는다. 사실 그 비결은 싱겁다. 인류의 유전자에 각인된 가장 소름끼치는 주파수를 반복적으로 사용했으니 당연히 긴장될 수밖에 없다.
사운드가 이런 식으로 청각을 괴롭히는 동안 카메라는 상대적으로 단순하게 움직인다. 스테디캠으로 촬영된 인물은 분명 이동하고 있지만 화면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귀신은 영화의 가장 밝은 곳에서 보란듯이 등장한다. 이런 방식은 흰 도화지 위에서 움직이는 붉은 레이저포인터 마냥 시선을 극도로 제한해 관객이 바늘 끝에 선 기분을 느끼게 한다.
여기까지였다면 <샤이닝>은 영화보다는 인간이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을 테스트하는 두 시간짜리 실험용 영상에 가까웠을 거지만, 영화는 한 발짝 나아가 내러티브를 통해 생리적인 공포 반응에 이름을 붙여준다. 토렌스 가족이 오버룩 호텔에서 겪은 이야기에는 미쳐서 가족을 공격하는 가장, 실패한 작가의 고통, 장소의 공포, 불길한 예언, 아메리카 원주민의 복수 등 여러 태그를 붙일 수 있다. 시청각 교감신경 자극은 비명, 어린아이의 목소리, 배경 음악, 귀신과 추격전이라는 탈을 쓴다. 시공간을 초월한 환영을 볼 수 있는 핵심 인물들의 초능력은 영화 속 시공간을 뒤틀어 관객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게 만든다. 이렇게 깔아 놓은 판에서, 관객 개개인이 각자 가장 두려워하는 태그를 선택하면 그야말로 맞춤형 공포영화가 된다.
그리고 이런 뼈와 살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단연 배우와 그들의 연기다. 잭 니콜슨이 연기하는 잭 토렌스가 미쳐가는 모양은 <다크나이트>에서 히스 레져의 조커와 비슷하게 소름끼친다. 웬디 역할의 셜리 듀발의 도자기 인형 같은 연기는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만, 영화의 신경쇠약적인 측면을 온몸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잘 어울린다. 호텔의 주방장 할로렌으로 등장하는 스캣맨 크로더스의 선한 이마 주름과 둥근 눈은 무방비해 보여 비극성을 강화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적절한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 흑인 배우에게 주어진 유일한 역할이 가장 연약한 역이라는 건 비판받을 지점이다.
스포일러를 전혀 찾아보지 않은 까닭도 있겟지만, 나에게 <샤이닝>은 인간의 본능적 공포를 잘 분석하고 연출, 대본, 연기에 에너지를 잘 분배해, 한 치 앞을 내다보는 게 불가능할 정도의 몰입감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어쩌면 스포일러에 별 의미가 없기에 대단한 스포일러가 떠돌아다니지 않는 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설명할 문장은 ‘백문이 불여일견’ 하나뿐이다. 구구절절 길게 설명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 감각을 느끼는 것이니, 어서 가서 이 영화를 보시기를 강력하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