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누가 내 영어 좀 도와줘요!

영어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일단 해보는 수밖에

by 마흐니
20180318_024921_IMG_5331.JPG

혼자 여행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 중 하나는 소통이었다. 못 알아듣거나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을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파파고를 사용하기에는 인터넷 속도가 참으로 느렸다. 여행을 시작한 지 2~3개월 지났을 땐 눈치로 어떤 말을 할지 예상할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아주 기본적인 말도 알아듣지 못했다. 영어를 못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진짜 원어민의 말투와 속도는 처음 경험했다. 영어 때문에 답답함을 느낄 때마다 후회감을 느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후회를 매일 했다. 매~일


토론토에 도착하고 다음 날 물을 사러 마트에 갔을 때의 일이다. 물 한 통을 결제하는데 그렇게 많은 대화가 오고 갈 줄은 몰랐다. 우리는 삑! 바코드 스캔, ‘얼마입니다.’, 계산, ‘안녕히 가세요’가 끝 아닌가? 토론토에서는 계산할 때 ‘How are you?’라고 물으며 소소한 대화가 이어진다. 그리고 ‘봉지 필요하니? Do you need a bag?’라고 물어본다. 나는 이 쉬운 문장을 알아듣지 못했다. 점원이 봉지를 흔들기 전까지 말이다. 물 하나 사는데 물어볼 거로 생각하지 못해서 그냥 계산하면 끝이겠거니 했다. 그리고 ‘Do you need a receipt? 영수증 필요하니?’도 물어본다. 나는 예의 없게 ‘No!’ 이러고 돌아섰다. 어색해서 얼굴에 미소만 머금고 있었을 뿐 내 영어에는 미소가 없었다.

20180318_100924_output_4092874984.jpg 저 물 주문하는데도.. 물이 이거 저거 있는데 뭐 줄까? 몰라... 암거나... (땀 줄줄)

이렇게 점원과 기본적인 대화도 쩔쩔매는 데 아주 용감하게 토론토 대학교 캠퍼스 투어를 신청하고야 말았다. 캠퍼스 곳곳 건물 내부를 제대로 구경하고 싶었다. 내 영어 실력은 까맣게 잊은 채 투어에 합류했다. 투어를 책임진 학생은 뉴욕 출신의 말이 아주 빠른 학생이었다. 그렇게 나는 건물만 구경하고 어떤 용도의 건물인지 상세한 정보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30% 정도만 알아듣고 대~충 이런 용도겠거니 추측한 것이 전부였다. 투어가 끝나고 카페에서 멍하니 커피를 마시는데 커피가 유독 썼다. 내가 공부한 것은 영어가 아니었구나. 부모님이 결제한 학원비는 모두 부질이 없었구나. 어떤 할아버지가 내 옆자리로 오면서 ‘여기 옆에 잠시 앉아도 되나요?’라는 말까지 못 알아들었으면 너무 슬펐을 것이다. 정확하게 알아들은 단 한 문장이 나를 위로하는 날이었다.

20180318_020626_IMG_5321.JPG
20180318_020622_IMG_5320.JPG

나는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이다. 나에게 영어는 외국어이기에 당연히 영어권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영어를 구사할 수 없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만 내가 놓친 문장들, 잘못 표현하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바꿔보자 다짐했다. ‘No!’ 대신에 ‘No, thanks’만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어도 성공이라는 마음을 가졌다. 혼자이기에 틀린 것을 시도할 수 있었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갔다면 많이 의지했을 것이다. 혹은 굳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무엇이 틀렸는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20180319_063104_IMG_5547.JPG 영어울렁증에게 서브웨이 주문이란.... 모든 채소의 이름은 먹으면서 생각이 났다.


처음엔 이러다 영어를 못해서 불상사가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들 정도였다. 정말 다행히도 영어에 적응해서 나중에는 ‘와! 그래도 이곳에서 살면 죽지는 않겠어!’라고 생각할 정도가 되었다. 이른바 생존 영어 가능 레벨로 성장했달까? 아직 생활영어로 올라가려면 더 노력해야 하지만 ‘잘’ 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원어민이 아니고 원어민들도 내가 원어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의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들이 하는 말을 잘 듣고 따라 하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다가갈 수 있게 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 정도면 다시 집가야 하는거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