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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경험이란 없다

언젠가 다 써먹게 됩니다

by 달집사

내 생애 첫 직장은 대학교 졸업도 전에 만났다. 복수전공 중이던 경영학과의 주임교수가 나를 좋게 보셨고, 내가 취준을 앞둔 4학년이란 말에 자신이 창업한 회사 자리를 추천, 경험을 쌓아보고자 들어가게 됐다. 공부하던 과목과 연계된 중소기업 경영컨설팅 관련 사무를 맡았다. 워낙 작은 규모의 회사였던지라, 개인적으로는 이렇다 할 성장은 없었고 단지 '직장생활은 이런 식이겠구나' 워밍업 단계였다고 본다. 학교에서 보던 교수의 모습과 직장에서 보던 교수의 모습은 180도 달랐고, 왜 학교 커뮤니티 내에서 김 모 교수가 또라이라고 불리며 평이 안 좋았는지 그제서야 새삼 알아보기도 했다. 교수는 다른 직원들에게 별 것도 아닌 작은 것에 쉽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기 일쑤,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적이고 무서웠다. 학교에서는 그저 인자한 할아버지 미소로 웃던 모습이 많으셨는데 말이다. 난 학교와 직장을 병행하며 몇 개월 다니다가 '(학교 밖으로) 진짜 취직이 돼서' 그렇게 첫번째 이직을 했다.


대학교 시절내내 파워블로거였던 나는 온라인 마케팅이 재밌었다. 복수전공했던 경영학과에서도 가장 재밌게 수강했던 과목은 가장 노말하고 진입장벽이 낮았던 마케팅이었다. 사실 그외 다른 과목들은 한 개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줄곧 학창시절 내내 온라인 마케팅 분야로 인턴, 대외활동을 수료했던 나는 광고업과 미디어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당시 꽤 오랜 기간 한 아이돌그룹의 팬이기도 했던 나는 대중문화에도 관심이 많아 한때 언론홍보대행사에도 여럿 지원했었다. 누구나 다 아는 유명 대형 기획사들에는 서류탈락이 많았는데, 언론과 미디어에서 홍보 일을 전담하는 홍보대행사에는 종종 최종합격 통보를 받았다. 기억에 남는 한 곳은, 내 이력서가 너무 재밌어서 직원들과 다함께 돌려보며 이 사람을 꼭 한번 만나고 싶어 면접으로 불렀다는 인사담당자도 계셨었다. 보통 본인들 업계에는 관련 예체능 전공자들이 지원을 하는데, 나는 이들과 아예 상관없는 다른 전공과 경력이 있어 이 사람 뭐지? 호기심이 앞섰다는 것. 이 곳도 결국 최종합격이었는데 터무니없이 작은 월급과 내 이상과 상당히 다른 현실 내면을 알게 된 후... 감사했지만 고사하게 됐다. 돈 보다는 재밌는 일을 하고 싶다는 20대 초반의 당찬 포부가 있었음에도, 그 나름의 기준을 한참 밑도는 수준의 임금체계가 아쉬웠다.


그러던 중 나는 여러 곳의 면접을 다녀보다가, 한 광고대행사에 취직했다. 크게 고민하진 않았다. 단순히 그 회사의 포트폴리오에 굵직굵직한 대기업들이 광고주로 이름을 많이 올리고 있었으며, 평소 관심있던 온오프라인 광고 실무를 가까이 접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런데 뭐든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 광고대행사는 바빠도 너무 바빴다. 인력을 갈아넣는다는 말을 실감한 곳이기도 했다. 야근이 일상이었던 업계였는데, 퇴근시간 관련해 웃픈 말들이 있었다. '오늘은 일찍 가라'는 저녁 8시 퇴근, '오늘 좀 늦겠네'는 밤 10시 퇴근, '오늘은 집에 갈 생각을 마라' 말인즉슨, 새벽 두 세시 퇴근을 뜻했다. 실제로 남자 직원들은 새벽 퇴근 후, 근처 사우나에서 씻고 취침을 하고 다시 아침에 출근하는 패턴이 잦았다. 물론 광고업계 모든 회사가 그렇진 않겠지만, 내가 다녔던 곳은 우스갯소리로 '여직원들은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는 사람이 아닌, 홀로 자취하는 사람이 다니기 편할 것'이라고도 했다. 자취하는 사람은 아무리 밤 늦게 귀가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에서 였다. 지금 생각해도 요상하긴 하다. 왜 꼭 밤 10시에 회의를 시작할까? 나는 20대 중반이 되도록 나홀로 택시를 타본 적이 없었는데, 광고대행사를 다니는 동안엔 허구헌날 새벽 2시에 총알택시를 타고 학동에서 분당까지 날아 들어왔다. 이를 영 못마땅히 여겼던 부모님이 강력히 반대를 해, 결국 나는 반년이 채 안돼 백기를 들었다. 펄럭. 항복.




세 번째 직장은 출판그룹이었다. 출판사와 어학원이 함께 있는 중견기업이었는데, 여기서도 역시 온라인마케팅이었다. 지점이 여러 곳에 있어, 서울과 강남을 오가며 근무했다. 그래도 서울 한복판에 큰 건물에서 일하며 종로와 광화문 일대를 내 집 드나들듯 다닌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당시 좋은 사람들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출퇴근 시간을 지켜가며 근무할 수 있음에 만족했다. 그러나 어학원 부서에서 내가 맡았던 외국어가 지극히 내 성향과 적성엔 맞질 않아 진심 담긴 컨텐츠를 만들기 어려웠고, 흥미가 쉽게 떨어졌다. 또한 이 시기에 나는 회식과 같은 단체생활에 상당한 피로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마케팅 실무에서 심도 있는 수준으로 공부하고 깊이 배울 수 있었지만, 말미에는 업무 자체에 권태감이 들기도 한 게 사실이다.


네 번째 직장은 대학교로 간다. 나는 마케팅과 아예 상관없는 새로운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그 전까지는 외근도 잦고, 야근도 일삼는 동적인 분야에서 근무했었다면 이제는 9 to 6를 정확히 지키며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정적인 사무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그리고 대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내 적성이 여기 숨어있었구나' 크게 만족하며 다녔더랬다. 게다가 학교로 오니 생각지 못한 어마어마한 메리트가 있었다. 방학 그리고 단축근무! 이 또한 물론 학교마다, 부서마다, 팀마다 조금씩 시행 정도가 다르지만 내가 있던 곳은 오후 3시면 퇴근할 수 있는 방학중 단축근무 제도가 있었다. 교수들의 연구비를 지원하고 교내 학술행사를 담당하던 업무에서, 자금을 다루는 회계팀으로까지 근무를 했다. 세금계산서가 다 뭐야... 기초 회계지식도 없던 나는 기본적인 문의전화 한 통 받질 못하는 내 자신이 바보같다 느껴 2달간 공부해서 전산회계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아주 조금 자신감이 붙은 나는 그때부터 신중하게 회계업무를 볼 수 있었고, 부가세 신고를 담당했다. 장생활에 천운이라 할 수 있는 좋은 사수가 곁에 있었기에, 대학교에서도 끝까지 좋은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이 사수와는 지금도 연락하며 잘 만난다.


사진 출처: 본인 제공


그 다음은 지금의 우리 쿠킹스튜디오. 엄마의 오랜 염원이던 작업실을 오픈하면서 딸인 내가 함께 이 사업을 꾸려나가게 됐다. 사부작거리며 놀기엔 감사하게도 자리를 일찍 잡아,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는 공간으로 성장했고, 그 중심에 내가 실무를 총괄 담당하고 있다.


이렇듯 돌아보면 나는 꽤 많은 이직을 경험했다. 좋게 말하면 어린 나이에 빨리빨리 갈아타며 다양한 직종에서 많은 경험을 했다는 것이고, 안 좋게 말하자면 무엇 하나 진득히 견디진 못했다고 할까. 아무리 평생직장 시대는 지났다지만 불안감이 전혀 없었다면 그건 분명 거짓말이다. 괴롭던 시기도 있었고 지겨운 시기도 있었다. 출근길에 차에 치이고 싶다는 생각도 여럿 해봤다. 하지만 웃기게도 인간의 기억이란 돌아보면 뭐든 미화가 된다. '그래도 그 시기엔' 이걸 배웠고, '그래도 이 시기엔' 이런 인맥을 만날 수 있었고, '그래도 저 시기엔' 이런 곳도 다녀봤다는 둥 어디든 장단점이 함께 남아있다.




돈 계산하다가 실수할까 무서워 포쓰 앞에는 절대 서지 않겠다며 빵 포장과 시식코너만 담당했던 백화점 베이커리 알바 시절. 촛점도 못 맞추고 구도를 몰라 사진을 못 찍는다며 핀잔듣기 일쑤였던 잡지사 인턴 시절. 광고기획안을 준비해야 하는데 PPT를 예쁘게 꾸밀 줄 몰라 사수들의 세련된 작업물을 부러워하며 흉내내기 바빴던 광고대행사 시절.


어설프기 짝이 없던 21살, 22살, 23살의 나를 지나 30대가 된 지금은 30만원짜리 중고 dslr로 겁없이 상품사진을 촬영해 sns에 광고하고, 그렇게 지겨워하고 그만하고 싶어했던 온라인마케팅 실무는 우리 사업에서 마음껏 있는대로 녹여내고 있으며, 부가세/원천세/종소세 등의 온갖 세금을 신고하고, 분기별 현황보고와 프로젝트를 위한 파워포인트까지 뚝딱뚝딱 만들고 있다. 이런 내가 산증인이기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쓸데없는 경험이란 없다. 언젠가 다 써먹게 됩니다. 전 그렇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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