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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집사 Oct 15. 2022

엄마의 이상하고 남다른 촉

미친 기억력의 소유자

엄마와 내가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은 다르다. 수업 내내 뒤쪽에 서서 뒷정리와 설거지를 담당하는 나는, 보통 수강생들의 뒷모습을 많이 본다. 반면 엄마는 수업시간 내내 수강생들과 눈을 마주하고 얼굴을 바라본다. 그래서 엄마는 처음 뵙는 수강생들의 이름은 잘 못 외워도, 그 사람의 얼굴과 특징은 신기할 만큼 잘도 기억한다.


"잘 지냈어요? 머리 잘랐네? 잘 어울려요."


한번 다녀간 수강생님을 두 번째 보는 날, 첫인사를 이렇게 건네는 엄마. 그럼 깜짝 놀라신다. 긴 머리를 단발로 싹둑 자른 것도 아닌지라, 내 눈에는 알아보기 어렵다. (아니, 원래 이쪽으론 한참 둔감한 편....) 수업 끝나고 어떻게 알았냐고 엄마한테 물어보면, 아주 태연하게도 '머리를 좀 다듬으신 것 같아서' 씨익 웃는 엄마. 엄마 눈썰미 정말 놀라워. 칭찬해...


지난번엔 아주 깜짝 놀랐던 적도 있다. 두 번째로 뵙는 수강생님이셨는데, 현관에서 걸어 들어오시는 모습만 보고 엄마는 '잘 지냈어요? 혹시... 임신하셨어요?' 물어보셨다. 내 눈에는 전혀. 저언혀. 배가 나온 것도 아니고, 아무 별반 다를 바가 없었는데 어째서. 난 순간적으로 엄마가 실수한 줄 알고 뒤에서 뜨악한 표정으로 열심히 엄마에게 눈짓을 보내고 있었는데 나보다 더 깜짝 놀란 수강생님의 한 마디.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선생님? 저 8주 차 됐어요!"


엄마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걸어오는 데 그런 감이 오더라구요. 너무 축하해요. 혹시 수업 중에 힘들면 언제든지 의자에 편히 앉아요'


사진 출처: 본인 제공


엄마의 감은 대체 뭘까. 엄마의 눈은 못 속인다는 말도 있는데 정말 무섭도록 신기하고, 알수록 놀라울 때가 많다. 이젠 나이가 있어 얘기할 때 단어 생각이 좀처럼 나질 않는다며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가 많은 엄마. 평소 메모를 하는 것도 아니고 따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기억력 하나는 정말 놀라울 때가 종종 있다. 가끔 기억에 혼선이 올 때도 있긴 하지만 그 정도쯤은 애교 수준이다.


사람의 얼굴과 특징을 사진 찍듯이 머릿속으로 기억하는 엄마와 달리, 나는 모든 걸 노트북에 적어둔다. 메모는 나의 삶. 모든 데이터는 내 노트북의 각종 엑셀파일에 자리한다. 노트북 속 메모가 없으면 나는 말짱도루묵이다.


매번 수업이 끝나면, 내가 관리하는 별도 엑셀파일에 신규 수강생님들의 특징을 간단히 키워드로 정리해둔다. 수업시간에 나눈 대화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들 위주로... 좋아하는 음식, 못 드시는 식재료, 알러지 유무, 직장이나 집 위치, 직업, 성격이나 성향 등. 주기적으로 자주 오시는 수강생님들은 차 번호도 적어둔다. 수업 끝날 때쯤 자차를 운전해서 오신 분들께는 주차 할인을 처리해야 하는데, 이렇게 메모해놓으면 굳이 매번 묻지 않고, 수업 끝날 때쯤 내가 알아서 조용히 주차를 처리해놓을 수 있어 서로 편하다. 나에겐 이렇게 관리하는 수강생 전용 대장파일이 있기에, 오랜만에 오시는 분들, 예를 들어 1년 혹은 2년 만에 연락을 주시더라도 나는 엑셀파일을 찾아보고 '아, 그때 이 분!' 하고 빠르게 기억해낼 수 있다.


"내일 수업 누구누구 오시니?"


"A, B, C선생님, D.

B는 처음 오시는 분이야."


"A는 누구지?"


"그, 저번에 이태리가정식 수업 때 오셨고, 병원에서 근무하고 손 빠르셨던 여자분"


"아아, 기억난다. 오케이."



사진 출처: 본인 제공



이렇게 서로를 기억하면 쉽게 친해질 수 있어, 자주 오시는 수강생님들과는 정말 친근한 사이로 오래 보며 지내고 있다. 바로 어제 있었던 따끈따끈했던 기분 좋은 에피소드 하나를 곁들인다. 2년 가까이 꾸준히 매달 오시는 수강생님께서 스튜디오에 들어오시자마자 싱글벙글 기쁜 얼굴로,


"선생님, 저 회사에서 시험 보는 거 있다고 했잖아요. 저 그거 오늘 결과 나왔는데 합격했어요! 그래서 이제 이직할 수 있어요!"


"어머, 너무 축하해요! 안 그래도 매달 꼬박꼬박 오시는데 지난달에는 교육 때문에 처음으로 못 왔잖아요. 너무 잘됐다,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남편이랑 가족분들이 다 너무 좋아하시겠다. 오늘 수업 끝나고 닭볶음탕에 와인 한잔 하셔야겠네?"


이렇게 소소한 일상 속 희로애락을 함께 나눌 수 있어 너무 감사하다. 좋은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걱정스러운 일이 있어도 기꺼이 나누고자 하는 수강생분들이 계셔서 우리는 늘 그들에게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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