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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 Apr 17. 2021

서평. 페스트를, 살아내기

1947 소설. 『페스트』(알베르 카뮈)

페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4


들어가며. 페스트의 밖

  지금과 같이 코로나 팬데믹이 일상을 덮치기 전에 <페스트>는, 세상을 향해 분투했던 시간이 열어 밝혀지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카뮈는, <페스트>에서,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상(世界像)과 그 안에서 분투하며 살아가는 개인들의 특수한 삶을, 페스트가 덮친 오랑시의 모습을 통해 탁월하게 풀어냈는데, 오랑시 사람들과 같은 경험을 한 일이 없다면, ‘페스트’는 당장엔, 내적 전쟁 상태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는 불가해한 사건으로 삶이 전복되는 것 같은 경험을 하곤 하는데, 그것을 두고, 바로 ‘페스트’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상태에서도 좋다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런 것을 알면서 거기서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321쪽)을 뿐이다. 




첫 번째. 페스트의 안

  소설 속 장 타루는, 이러한 깨달음을 선취(先取)한 인물이며, 페스트에서 영원히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찾는 사람이다. 타루는, 검사였던 아버지의 논고(論告)를 들으러 갔다가 아버지가 사형을 구형한 자의 사형집행 장면을 목도한 후, 이제껏 자신이 믿어온 가치체계가 전복되는 것을 느낀다. 이후, 그는 내적 전쟁 상태에 빠지고, 집을 나와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인간사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래서 타루는 의사 리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나는 이 도시와 전염병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페스트로 고생한 사람입니다”(319쪽)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329쪽) 

  타루의 이런 말만 곰곰 되새겨 보더라도, ‘페스트’는 인간 실존 방식을 은유한 말다. <페스트>를 읽는 사람 누구든, 경험의 강도나 밀도에서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타루처럼 페스트를 한 차례 겪어내고 자신의 삶을 이끌 어떤 형상을 찾는 도상 위에서 분투하고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처음 걸린 페스트에서 분투하면서 그것에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페스트'는 나의 실존을 은유한 말인 것이다. 그래서 타루가 가끔 찾아가던 노인도 “페스트가 대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인생이에요. 그뿐이죠”(399쪽)라고 말했던 것이다.  



두 번째. 페스트의 한가운데

  그런데, 지금, 오랑시를 덮쳤던 페스트처럼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 삶 전체를 덮치고, 전복시키고, 장악하고, 주도하게 되었으니, ‘페스트’를 이전처럼 인간 실존에 대한 은유로만 한가롭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처지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페스트> 속 오랑시와 같은 팬데믹에 내던져졌기 때문이다. 

  오랑시 시민의 일상은, 오늘날 우리 일상과 꼭 닮았으며,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지금 전 세계인의 감정을 대변한다. 나날이 진보하는 세상 속에서 미래를 낙관하는 기분에 익숙한 우리 세대는, “자꾸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213쪽)하는 이 바이러스 탓에, 요즘처럼 두려움불안을, 절절히 느낀 적이 없다. '페스트'가, 오랑시 사람들에게 생이별과 두려움과 불안과 무력감과 일시적인 희망과, 다시 생이별과 두려움과 불안과 무력감과 같은 기분에 반복적으로 처하게 했던 것처럼,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를 이런 감정에 반복적으로 내던진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페스트>는 이제, 전과 같이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인이 내던져진 상황을 들여다보게 한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페스트> 속 오랑과 같은 팬데믹 상황에 내던져졌으며, 알베르 카뮈는, 재난 상황에 내던져진 개인이 개별적 차원에서 하는 실존적 고민과, 인간이 보편적 차원에서 경험하는 감정을, <페스트>에 미리 묘사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스트>를 읽는 사람은, 페스트를 인간사에 대한 메타포로 설명하는 타루의 관념적이고 은유적 이야기보다, 오랑시 시민이 내던져진 상황에 관한 이야기에 더 몰두하게 된다. 사람들은 카뮈의 이야기를 추체험(追體驗)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게 된 것이다. ‘페스트’라는 추상이 이제 현현되었으므로, 페스트는 이제 추상이 아니다.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기대할 만한 자유와, 품을 수 있는 희망과, 얻을 수 있는 위안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이 나보다 더 부자유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선, 나는 적어도 그들보다 더 절망할 만한 처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일일 것이다. “다른 지역 주민들은 곤란한 순간에 부닥쳐도,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자기네들보다 덜 자유롭다는 것을 상상하고는 어떤 위안을 얻는 것이었다. ‘항상 나보다 더 부자유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무렵에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을 요약하는 표현이었다”(223쪽) 그러면서도 내가 있는 곳의 상황이 안심할 만하다 싶을 때, 다른 곳에서 “자꾸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213쪽)하니, 희망이 오는가 싶으면 금새 지나쳐 간다.  



세 번째. 페스트를, 살아내기

  이제, 타루가 선취한 깨달음은, 새로운 상황을 매개로 새롭게 물어온다. 이전에는, '내 안에 있는 페스트를 발견한 일이 있는지', '내 삶이 페스트에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를 물어왔다면, 이젠, '페스트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어떻게 페스트와 함께 살아갈 것인지'를 물어온다. <페스트>를 읽으며, 새로운 과제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제한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하게 하고, 꿈꿔왔던 삶의 양식을 모조리 바꿔놓는, 그런 사건에 직면했을 때, 한편으로는 그러한 상황에 적응해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상황을 극복하고, 그 너머에 있는 의미를 발견하고 실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즉, <페스트>는 '삶을 어떤 과녁에 맞춰 기획해야 하는지'를 물어온다. 그 답은 소설 속 인물들이 혼란한 오랑시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적중시키며 삶을 기획하고 살아냈는지를 살펴보면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타루는 재난 상황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오랑시 시민의 모습과 일상을 기록했으며, 리유는 환자의 고통에 집중했으며, 그랑은 페스트의 한가운데서도 이야기를 창작하며 자기를 지켜나갔고, 파늘루 신부는 하느님이 페스트를 통해 건네는 복음을 전파하며 사람들을 계도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했다. 

  그런데, 각기 다른 삶의 도상에 있던 세 인물, 즉 타루, 리유, 그랑, 파늘루 신부는 보건대를 결집한 후 공동체 문제를 극복하는 데에 참여하기로 한다. 이미 정신적·심리적 페스트를 앓고 난 후 오랑에 머무르던 타루는, 오랑에 페스트가 닥쳤을 때 기꺼이 병원에서 일손을 돕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기로 한다. 의사 리유는, 의사 역할에 미련할 정도로 충실하려고 한다. 시청 직원인 그랑은, 글을 한 편 써보겠다는 의지로 문장 하나를 두고 매일 분투하면서도 보건대의 서기 역할을 담당하기로 한다. 파늘루 신부는, 보건대 일을 도우며 틈틈이 강론과 기도로 환자들을 치유하고 위로했다. 특히,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에 감염된 죄 없는 어린이의 고통과 죽음을 목도한 이후,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였고, 이전과 다른 말을 사용했다. 파늘루 신부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이들이 다시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구원의 경륜으로서, 페스트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열렬히 강론하곤 했지만, 보건대에서 죄 없는 어린이의 고통과 죽음을 접하고 난 이후엔, 그 불가해한 고통과 슬픔 속에서 침묵하기를 선택했고, 어쩌다 강론을 할 때면, “‘여러분’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들’이라는 말을”(290쪽)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 세 사람은, 페스트의 한가운데에서 연대하며 페스트를 극복하고, 자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실현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연대하기 시작한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공감 사랑의 의미도 발견해 나갔다. 처음으로 자신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때 타루와 리유는, 서로 어떤 존재로 자기를 실현하기를 원하는지, 이야기한다. 타루는 어떤 일에서든 희생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이고, 공감은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며,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자신의 관심사라고 고백한다. 리유는 자신은 패배자들에게 연대의식을 느끼며, 그저 인간이 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관심사라고 고백한다. 이에 타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332p) 실로, 타루는 우리 삶에 도사리는 개인적·사회적 부조리의 다른 말인 ‘페스트’에 시달리며 마음의 평화에서 멀어지고 두려움과 불안에 처한 사람들 및 페스트로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하여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 모두를 염두에 둔 한편, 리유는 실제 페스트균에 전염되어 고통에 처한 환자들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둘은 언제나 희생자들 편에서 함께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던 터였다. 리유가 한 앞의 말을 듣고, 타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인간은 희생자들을 위해서 싸워야 하죠. 그러나 사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게 되고 만다면 투쟁은 해서 뭣하겠어요?”(333쪽) 이후, 둘은 우정과 친애를 느끼며 서로의 안부를 살폈고, 보건대의 일을 돌보았으며, 시민의 고통과 슬픔 곁에 머물렀다. 




나가며. 다시, 페스트의 밖

  과연 연대와 공감과 사랑이야말로 “혼자서 고독하게 슬픔을 겪어야 하는 일이 너무나 잦은 세계 속에”(393쪽) 처한 인간에게 언제나 필요한 것이며, 오늘날처럼 코로나 팬데믹에 처한 인간에게 특별히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페스트가 종식되었을 때, 이를 깨달은 리유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사랑과 고통과 귀양살이 속에서 그들과 한 덩어리가 되고자 했다”(393쪽) 또, “슬픔을 넘어서 자신이 그들과 통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401쪽)

  전염병으로서의 <페스트>, 즉 리유가 주로 싸운 <페스트>는, 지금의 혼란한 사태가 종식된 미래에로, 미리 달려가서, ‘그 혼란했던 시기에, 나는, 어떤 존재가 되고자 했으며,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었는지’를 물어왔다. 이와 더불어 삶에 대한 은유로서의 <페스트>, 즉 타루가 주로 싸운 <페스트>는, 앞으로 내던져질 삶의 한가운데로 앞서 달려가서, '이제, 내가 새롭게 시달리는 '페스트'는, 어떤 종류의 것이며, 나를 어떤 존재로 결단하게 하는지', 그리고 '이전에 내가 줄곧 시달렸던 '페스트'에서는 다 치유되었는지'를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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