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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 Apr 13. 2021

영화비평. 구원에 관한, 아름답고 보편적인 이야기

2021 영화. <미나리>

*스포가 있습니다.

*4월 10일에 올렸던 글을 다시 발행합니다. 이왕 다시 발행하는 김에, 몇 자 수정하였으며, 성경 속 야곱의 이야기도 추가하였습니다. 



미나리 Minari 

2020 제작 | 미국 | 드라마 | 2021.03.03 개봉 | 12세이상 관람가 | 115분

감독 리 아이작 정


들어가며신극으로서의 <미나리>

  영화 <미나리>는 이민자의 삶에 관한 서사이면서 일종의 신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민자의 삶에 관한 서사로 접근하면 너무 뻔해지고, 일종의 신극-Theodrama, 하느님이 연출한 드라마라는 의미로, 스위스의 사제이며 신학자인 한스 우루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r, 1905-1988)가 고안한 개념-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더 뻔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신극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할 때, 영화는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한다. 왜냐하면 신극이란, 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도구로서의 드라마를 의미하는데, 이 영화는, 신극에 어울리는 선악의 문제나 신극적 상상력을 다루진 않지만, 서로를 구원하려고 미국에 온 제이콥과 모니카가 구원을 어떻게 찾아가는지와, 구원의 경륜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 이민자의 삶이나 소외, 그리고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꼭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다른 매개들이 많다. 이 영화를 두고 "아름답고 보편적"이라고 한 봉준호 감독의 말도, 이 영화를 신극으로 보는 데에 힘을 실어준다. 이민자의 삶에 관한 서사보다, 신극 안에서 펼쳐지는 인간사야말로, 더욱 보편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칸소로 떠나온 제이콥 가족의 이야기를, 신극이라는 관점에서, 곰곰 떠올려 보려고 한다.    




구원의 경륜. 일곱 길



첫 번째 길보이지 않는 힘을 불신하는 제이콥

  제이콥은, 황량한 땅 한가운데 바퀴 달린 집을 마련했다. 가족이 살게 된 집을 처음 본 제이콥의 아내 모니카는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진다면서 걱정한다. 모니카는 아무래도 터를 잘못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제이콥은,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기게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황량한 땅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제이콥은 트랙터와 물이 필요하다. 트랙터는 폴에게 구입하고, 물은 수맥을 찾아준다는 사람에게 기대해 보지만 그것은 비합리적인 방식이기에 양손에 나뭇가지를 잡고 탐색하는 사람이 아무래도 돈을 벌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만 같다. 그래서 제이콥은 그를 내보낸다. 제이콥은, 한국인은 머리를 쓴다면서, 물은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식물은 물을 필요로 하므로 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곳에 물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아들과 함께 추론한 후, 물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 땅을 파기 시작한다. 예측대로, 제이콥이 파낸 땅 속에선, 과연 물이 퐁퐁 솟아올라와 제이콥의 다리를 적셨다.        

  한편, 트랙터를 넘긴 폴은, 하느님이 엄청난 것을 제이콥 가족에게 줄 거라며 제이콥 앞에서, 두 팔 벌려 찬미한다. 제이콥은, 그 모습을 보는 게 참으로 마뜩잖지만 일손이 궁한 사정이라 일을 잘할 자신이 있다는 폴과 함께,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폴은 일을 잘하긴 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두 팔을 휘휘 저으며 실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쫓아내곤 하니, 제이콥은 그가 영 미심쩍고 한심스럽다.  

  제이콥은 비합리적이고 주술적 방식으로 초자연의 힘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 물 공급 문제는 자연의 원리나 돈에 기대어 해결하면 될 문제지 보이지 않는 수맥을 찾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집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나쁜 기운은 보이지 않기에 그 존재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길열매 맺지 못하는 삶을 두려워하는 제이콥

  농사가 잘 되는 것 같다가도, 농지에 댈 물은 물론이고 생활용수까지 끊기는 사정에 처하게 되었으니, 모니카가 바퀴 달린 집에 도착한 날에 했던 말대로, 제이콥 가족의 처지는 과연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사정이 안 좋아질수록, 제이콥과 모니카는 캘리포니아에서 하던 일인 병아리를 감별하는 일을 아칸소에서도 열심히 해야 한다. 아이들을 돌봐 줄 사람이 없으니, 제이콥과 모니카는 딸 앤과 아들 데이빗을 공장에 데리고 가곤 한다. 

  거기에서, 아버지 제이콥은, 아들 데이빗에게 자신 안에 있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교훈적이 어조로 이야기한다. 공장 굴뚝에서 퍼지는 검은 연기를 본 데이빗이 무슨 연기냐고 제이콥에게 묻자, 제이콥은 공장에서 수컷 병아리를 폐기해서 생긴 연기라고 알려준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수컷 병아리처럼 되지 않으려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아들에게 전한다. 

  제이콥의 말은, 열매 맺지 못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다. 특히 아버지가 아들에게 기대와 염려 섞인 마음으로 전하는 말에는 수컷이 가진 두려움이 배어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은,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갖는 불안이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아버지이자 남편인 제이콥이 지닌 두려움에 들어맞는 표현인 것 같다. 생물학적으로 암컷 병아리는 새끼를 낳아 열매를 맺지만, 그럴 능력이 없는 수컷 병아리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폐기되는 것일 텐데, 이러한 사정을 제이콥과 데이빗의 입장에 대응시키면, 두 사람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떤 열매를 맺지 못할 경우엔,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리진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 제이콥은, 특히 아들 데이빗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 번째 길교회 공동체와 십자가의 길 모두에 참여하지 못하는 제이콥 가족  

  제이콥과 모니카가 지쳐갈 때쯤, 모니카의 엄마인 순자가, 딸네 가족과 함께 살러, 바퀴 달린 집으로 온다. 점점 안 좋아지던 사정 중에, 모니카에게 위안이 생긴 것이다. 엄마와 함께 살게 되어 모니카는 기뻤고, 그런 모니카를 오랜만에 볼 수 있어서 제이콥 역시 행복했다. 하지만, 앤와 데이빗은 할머니가 영 마뜩잖다. 제이콥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일 줄 알았던 미국인들이 수맥이나 신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것처럼, 데이빗과 앤은 할머니가 영 마음에 들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모니카는 교회에 다녀보겠다는 제이콥의 말을 듣는다. 엄마가 온 이후로, 의지할 사람이 생겨 마음이 안정되어 가는데, 제이콥까지 교회에 나가겠다니, 모니카는 아칸소의 이 황량한 땅에서 점점 구해지는 것만 같다. 모니카는, 엄마와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교회로 향한다. 

  모니카는 자신이 본래 속해 있던 엄마와 함께 살면, 또 데이빗만 건강해지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마음도 오래가지는 못한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은 변하므로, 누구보다 속 깊고 인내심 많아 보이는 모니카 역시 한 가지 마음에만 머물 순 없었을 것이다. 시리던 마음에 기쁘고 따스한 기운이 스며드는가 싶으면, 다시 불안하고 외로워진다. 

  아마도 제이콥은, 모니카의 마음에 충전되었던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다 방전되어 버려, 모니카의 얼굴에서 행복의 빛이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교회에 나가보겠다고 했을 것이다. 모니카는 가족이 그곳에 속하게 된다면, 그곳이 가족에게 기쁘고 따뜻한 공동체가 되어줄지도 모르며, 그곳에 가면 자신이 이 땅에서 더 살아낼 힘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며, 앤과 데이빗이 이곳에서 소외당하지 않고 뿌리내리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며, 무엇보다도 아픈 데이빗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느님 안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칸소에서 첫 예배를 본 날, 제이콥 가족은, 교회에 있는 내내, 이방인이라는 느낌에 사로잡히면서도 안정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려고, 애썼다. 다 함께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는 기쁨보다는, 아칸소에 온 후 결핍감과 소외감을 오랜만에 마주한 제이콥 가족은, 집으로 돌아가던 중, 작은 교회 안에서 섞이지 못한 자기 가족보다, 넓은 이 땅에서 더욱 낯설고 이방인 같은 모습의 폴을 보게 된다. 폴이, 매우 크고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어깨에 진 채, 힘들게 걷고 있던 것이다. 제이콥이 차를 세우고 창을 내려 이 고통스러운 나그네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폴은 십자가를 지고 걷는 것이 자신의 예배라고 말한다. 

  기도와 노동으로 살아가며 십자가의 고통에 온 마음과 몸으로 참여하는 폴은, 교회 아이들이 아무리 그를 무시해도, 그 이름에 맞갖은 삶을 사는 사람이다. 폴이라는 이름의 연원이, 믿음의 사도 바오로에 있으니 말이다. 물론 제이콥과 모니카도 이름이 은유하는 바가 있다. 제이콥이라는 이름의 연원은, 창세기에서 하느님에게 선택받아 대대손손 번성하는 복을 누리는 야곱에 있으며,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의 어머니로 교회 밖에 있던 시어머니와 남편과 아들을 교회로 인도한 성녀의 이름을 따른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열매 맺고 번성하는 삶을 살려는 제이콥과, 이런 제이콥을 교회 공동체로 인도하려는 모니카는, 이름에, 그들의 지향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제이콥은, 신을 믿지 않는 것 같고, 모니카는, 폴처럼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기보다는, 가족의 평안을 위해 기도할 전지전능한 존재와, 보호받을 수 있는 교회 공동체가, 필요한 탓에, 교회에 이끌리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네 번째 길기도해줄 구원자가 필요한 제이콥 가족

  이제, 아이들이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고, 아이들이 집에 있는 동안은 순자가 돌봐주는 덕에, 모니카는 이전보다 마음 놓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순자에게 갑작스럽게 뇌졸중이 발병한다. 생기 넘치던 순자는, 병원 치료를 받아도 호전될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고 어눌하게 말하고 행동할 뿐만 아니라 헛것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모니카는, 폴의 기도에 의지해 보기로 한다. 모니카는, 집에 처음으로 초대한 사람인 폴에게, 따뜻하게 대접하고, 그가 기도할 때 곁에서 함께 기도한다. 모니카가 처한 이러한 상황에서는, 더 큰 믿음을 가진 폴과 같은 사람이 구원의 매개자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   

  폴이 구마를 하고 순자의 침대 발치에서 깊이 기도한 후 집에서 나가자, 제이콥은 별 이상한 짓을 다한다며 볼멘소리만 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집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척하는 일도, 뭐라도 보인다고 착각하는 일도, 제이콥은 불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국에 있는 딸의 집으로 와서 함께 살게 된 엄마가, 갑자기 아프고 늙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딸은 자기보다 더 절박하게 기도해줄 사람을, 찾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순간 모니카에게 폴은 적어도 당장에 찾을 수 있는 구원자이며 가장 의지할 만한 사람이다.     




다섯 번째 길서로를 구해 주자고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제이콥과 모니카

  한편, 심장이 아팠던 데이빗은, 할머니가 달인 한약 덕분인지 아니면 할머니의 사랑 덕분인지, 건강이 크게 호전된다. 모니카는, 아들이 건강해졌다는 소식에 누구보다도 기뻐하지만, 아들 건강 문제로 병원에 가는 길에서조차 거래처를 알아보려고 농작물을 들고 온 남편의 모습이나, 아들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캘리포니아로 함께 돌아가자고 말했을 때 아칸소에 혼자라도 남아 성공해 보이겠다는 남편의 모습이나, 농작물을 납품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기뻐하는 남편의 모습이 몹시 서운하게만 느껴진다.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엔, 데이빗한테 쓸 돈만 남겨두면 된다고, 자신은 그것 하나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제이콥에게 말했던 모니카였다. 그런데, 지금은 데이빗에게 쓸 돈을 남겨둘 수 있도록, 농작물을 납품할 수 있게 된 터였다. 

  아들이 건강해지고 농작물도 납품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제이콥은, 아내와 딸과 아들이 이 일을 함께 기뻐하고 자신을 마음 놓고 자랑스러워해 줄 줄 알았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자신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외롭고 두렵고 서러웠을 것이기에, 그 기쁨이 더 컸을 것이다. 가족과 함께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막한 상황에서, 이로써 스스로를 구했다고, 제이콥은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니카는, 서운함과 슬픔과 실망이 휘몰아치는 마음을, 제이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서서, 제이콥을 향해, 조용히 터뜨린다. 제이콥은 자신이 바란 일 두 가지, 즉 아들의 건강 문제와 농작물을 납품하는 문제를 모두 해결했기에 크게 기뻐할지 모르지만, 모니카는, 미국으로 오기 전에 제이콥과 했던 약속인, 서로를 구해주자고 했던 약속을, 제이콥이 언제나 기억해주기를 바랐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기를 바랐다. 모니카는, 제이콥과 함께 소망하던 바를 이루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때인 만큼, 마음 놓고 기뻐할 만했지만, 서로를 구해주자고 했던 약속을 잊은 것 같은 남편을 보면서, 서운함과 실망감과 두려움이 휘몰아쳤던 것이다. 고생하는 남편과 아픈 아들과 철든 딸을 보면서, 그동안 입 밖으로 터지지 않도록 잘 붙잡고 있던 마음이, 안도해도 되는 상황이 되자마자, 터져버린 것이다.   

  모니카는, 제이콥이 아무래도 무모해 보이고 열매를 맺거나 맺지 못하는 상황에 따라 자신과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 달라지는 것 같으며, 자신을 구해주겠다던 약속을 잊은 것 같아서, 앞으로 제이콥과 함께 할 자신이 없다. 모니카는, 억척스럽게 일만 해서 원하는 바를 성취한 제이콥이, 자랑스럽기보다는 일의 결과에 따라 마음이 바뀌는 비겁한 남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제이콥은, 아칸소로 이사한 후 가장 기쁘고 보람된 날인 줄로만 알았는데, 가장 외롭고 비참한 날인 것처럼 느껴진다. 




여섯 번째 길열매를 구하지 못한 제이콥과 모니카서로를 구한 제이콥과 모니카

  제이콥과 모니카가 서럽고 비참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곧 납품할 상품들로 가득 찬 창고가 불에 타고 있었다. 자손들이 할 일을 하나라도 줄여보려고, 순자가 쓰레기를 태우던 중, 바람에 쓰레기가 날리기 시작하면서 창고에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제이콥은 납품하기로 한 자신의 귀한 열매들을 하나라도 살리려고 화염에 싸인 상자들을 옮기고, 모니카는 남편을 돕는다. 제이콥과 모니카는 열매 하나라도 구해보려고 애쓰지만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다. 애타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던 두 사람은, 결국 창고 밖으로 함께 나온다. 그들이 나오자마자, 전소된 창고는 폭삭 주저앉는다. 

  그사이 넋을 잃은 순자는, 손자와 손녀가 아무리 불러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집과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데이빗이 달려가 할머니 앞을 막아서고, 데이빗과 앤이 염려 섞인 목소리로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자, 순자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천천히 집으로 걸어간다. 

  제이콥과 폴이 아주 탐스럽게 맺었다고 생각한 열매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제이콥은 돈을 벌 수 없게 되었고 가족을 바퀴 달린 집에서 하루빨리 구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제이콥과 모니카는 서로를 구했다. 또, 사랑과 정성으로 데이빗과 앤을 돌봤던 순자는, 이번엔 데이빗과 앤에 의해 구해졌다. 

  이날 밤, 바퀴 달린 집에 이사 온 첫날 제이콥이 했던 말인, 가족 모두가 마룻바닥에 다 함께 자자는 말이 실현된다. 창고가 불타버린 다음날 아침, 순자는 마룻바닥에서 꼭 붙어서 잠든, 딸과 사위, 손자와 손녀를, 가만, 바라본다. 

  제이콥 가족이 순자와 함께 살게 된 이후 데이빗이 건강해진 일, 제이콥과 모니카가 화염 속에서 서로를 구한 일, 데이빗과 앤이 넋 놓고 걷던 순자를 집으로 이끈 일은, 제이콥 가족이 서로를 구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는 직접적이고 극적인 사건일 뿐이며, 이들은 보이지 않게 서로를 내내 구하고 있었다. 즉, 이 세 가지 사건은 서로를 구하자고 했던 약속이 현현된 사건일 뿐이다. 




일곱 번째 길보이지 않는 것의 신비로 인도되어가는 제이콥

  비로소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했을 때, 모든 것이 불타 사라져 버렸으니, 창고가 불탄 다음 날은, 제이콥 가족에겐, 새 날이다. 제이콥은 데이빗과 함께 순자가 심은 미나리 밭으로 간다. 아무도 찾지 않는 후미진 골짜기 바위 옆에서 미나리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알아서 잘 자라고 있어, 제이콥이 보기에 좋았다. 

  미나리 씨를 뿌릴 곳을 찾던 순자가 무서운 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데이빗에게 말했듯이, 생명을 자라게 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과연 데이빗을 살게 한 힘도, 미나리를 번성하게 한 힘처럼,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데이빗이 진료를 받고 심장이 건강해지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날, 의사는, 제이콥과 모니카에게 무엇으로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데이빗을 알아서 잘 건강하게 한 것이 맞으니 중단하지 말고 그 방식을 따르라고 했다. 순자가 심은 미나리를 보면서, 제이콥은, 생명의 신비를 느꼈을 것이며, 새 생명을 얻은 듯이 건강해진 데이빗을 보면서, 모니카는, 구원의 신비를 느꼈을 것이다.  

  제이콥은, 아칸소에 왔을 때 수맥을 찾아 준다던 사람을 다시 불러, 물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제이콥은, 물이 흐른다고 여겨지는 지점이 발견되자, 아직은 미심쩍은 마음이 일지만, 그곳에 돌로 표식을 해둔다. 

  그런데, 영화의 이 마지막 장면은, 아무래도 구약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수맥을 찾아준다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는, 하느님에게서 모세를 거쳐 아론에게 전해진, 탈출기의 이야기 등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킨 지팡이-“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아론의 지팡이는 증언판 앞으로 도로 가져다 놓아, 반역자들에게 표징이 되도록 보존하여라. 그렇게 해서 너는 그들이 나에게 그만 투덜거려, 그런 일로 죽는 일이 없게 하여라.”” (민수기, 17:25) ““너는 지팡이를 집어 들고, 너의 형 아론과 함께 공동체를 불러 모아라. 그런 다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저 바위더러 물을 내라고 명령하여라. 이렇게 너는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여, 공동체와 그들의 가축이 마시게 하여라.””(민수기 20:8) “그러고 나서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그 바위를 두 번 치자,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 공동체와 그들의 가축이 물을 마셨다.” (민수기 20:9~11)-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제이콥의 돌은, 돌을 베개 삼아 자던 중에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꿈을 꾼 야곱이, 경외감에 휩싸여, 그 자리에 돌을 기념 기둥으로 세웠다는 창세기의 이야기-“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러 해가 지자 거기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면서, 두려움에 싸여 말하였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에 베었던 돌을 가져다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 그러고는 그곳의 이름을 베텔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즈였다. 그런 다음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창세기, 28:10~22)-를 떠올리게 한다. 

  또, 지팡이를 따라가선, 그 자리에 돌로 표식을 하던 제이콥의 모습은, 가족을 떠나 하느님과 씨름하면서 힘들게 살지만, 결국은 대대손손 번성하는 축복을 받은, 야곱의 삶을 기대하게 한다. 어쨌든, 제이콥은, 수맥을 찾는 지팡이가 자신에게 모세와 아론의 지팡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또 보이지 않는 것이 여전히 미심쩍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는 것의 신비를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나가며구원에 관한 아름답고 보편적인 이야기

  정이삭 감독은 이 영화가 자전적 이야기라고 했다. 그런데, 관객은 이 영화가 자전적 이야기라고 해도 설득되지만, 보이지 않는 신을 드러내려는 이야기들의 오래된 계보 안에 있다고 해도 설득된다. 아닌 게 아니라 감독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에 관한 이야기를, 데이빗을 통해 아래에서 되새기되, 위에서 조망하며, 신극으로 드러내 보이려고 했던 것 같다. 

  또, 제이콥 가족의 서사를 이끄는 힘은 보이지 않는 힘이며, 보이지 않음은 신의 속성인만큼, 이 드라마는 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혹은 신이 연출한 신극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정이삭 감독은 제이콥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 과제이며 보편적 지향인 구원을 다루었으며, 이 어렵고 무거우며 아주 오래된 주제를 다루면서도, 이야기에 아이의 순수함보이지 않는 신의 은총이 은연히 흐르게 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말대로 "아름답고 보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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