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다른 방식으로 보기』
책에 대한 요약을 하기 전에, 이 책의 구성 방식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 에세이를 독특한 방식으로 구성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의 「독자들에게」 장에서 그는,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느냐”를, 고심했다고 밝혔다. 이 책은 제목이 숫자로만 된 일곱 편의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 1, 3, 5, 7장은 글과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으나, 2, 4, 6장은 이미지로만 이루어져 있다. 1장에서 그는, “말”에 대한 “본다”라는 행위의 존재론적 위치를 역전시키고, 사회적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 미술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구체적 수단으로서, 3장에서는 누드화에 대해, 5장에서는 유화에 대해, 7장에서 광고에 대해 논의한다. 한편. 이미지들만 있는 2, 4, 6장의 경우 이미지에 대한 어떤 정보도 쓰여 있지 않은데, 이는 아마도 존 버거가 자신이 시도한 것처럼 문화적 가정들이나 선입견으로부터 독자가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이미지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복음서 1장 1절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며,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존 버거는 이 문장으로 자신의 철학적 지평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존 버거는, 인간의 실체를, 이성이나 정신적 존재로 파악하기보다는, 생각하고 의지하고 느끼는, 그럼으로써―그가 “실존적 존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매 상황에서 자신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형성해나가는 “실존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 거주하는 혹은 인간을 둘러싼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이 된다. 그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자신을 다르게 형성해나가며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를 수정하게 된다.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보는 행위가 말에 앞선다는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보는 행위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결정해 준다. 우리는 우리 주위를 에워싼 이 세계를 말로 설명하고는 있지만, 어떻게 이야기하든 우리가 보는 이 세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9쪽)
이렇게, 존 버거에게 이미지는 열린 텍스트로서 “X라는 사람이 Y라는 대상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기록”(13쪽)으로서 실존적 존재가 능동적으로 보고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이 되지만, 이미지 언어를 해석하는 일은 선입견, 즉 과거의 문화적 가정들을 의식하게 한다. 그 결과, 해석자는, “미(美), 진실, 천재성, 문명, 형식, 사회적 지위, 취향 등등”(14쪽)과 같은 선입견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고, 이러한 요소들에 준거해서 이미지를 분석한 결과, 해석 대상을 “신비화”하는 데 봉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신비화” 과정에는 그 이미지를 통해 체험할 수 있는 것을 보는 행위를 방해하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는데, 이를 의도하는 집단은 자신의 역할을 정당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소수의 지배 집단이다.
존 버거에 따르면, 이러한 “신비화”는, 지배계층의 이데올로기를 존속시키는 데 봉사할 뿐만 아니라, 이미지를 “본다”는 행위 혹은 사건 역시 소외시킨다. 그래서 이미지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을 “체험”이 아닌 “감상”의 수준에 머무르게 한다.
이와 함께 존 버거는 실제로 “보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보는 방식”은 고정된 것이 아님을 논증한다. 이를테면,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된 원근법은 관찰자가 지정한 소실점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질서 정연하게 보게 했지만, 카메라의 발명은 보이는 모든 것이 소실점에 따라 정돈될 수 없으며 시·공간의 변화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했다. 또, 이에 영향을 받은 인상파의 유화 기법은 변화하는 시·공간 속에 있는 가시적인 모든 것의 쉼 없는 변화를 현실의 전체적 이미지로 보게 했다.
특히, 카메라의 발명은 이전 시대의 그림들을 “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카메라의 발명으로 이전 시대의 예술 작품들이 복제되어 대중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복제된 이미지는 “여전히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다는 환상을 유지”(36쪽)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을 뿐이며, “그것이 지닌 유일무이한 변함없는 권위를 통해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36쪽)하는 데에 봉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시각예술의 역사를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시각예술은 늘 무언가를 보호하는 기능을 해왔기 때문이다. 처음에 보호해야 할 그 무언가는 신과 같은 성스러운 것이었다. 이를테면, 시각예술은 처음엔 제의(祭儀)의 한 요소로서 나타났으므로 삶의 다른 영역과는 분리될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을 지배하는 데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보호해야 할 그 무언가는 돈과 같은 물질적인 것이 되었다. 즉, 시각예술은 종교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적 영역을 보호하는 데에 봉사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따라서, 존 버거에게 중요한 일은, 보호받는 그 사회적 영역이 무엇인지, 이미지 언어의 사용 주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사용 목적이 무엇인지를, 역사적 경험을 통해 살펴보는 일이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더 많은 자유를 실현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중략) 스스로의 과거와 단절된 개인이나 계급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개인이나 계급에 비해, 선택이나 행동을 함에 있어 훨씬 덜 자유롭다. 바로 그 점이 과거의 예술 전체가 이제 정치적 문제가 된 이유―단 하나의 이유―이다." (40쪽)
존 버거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지배계급의 몰락을 아쉬워하며 이들에게 봉사하는 지식분자인 몇몇 전문가들의 비교주의적(秘敎主義的) 접근”(38쪽)에 투쟁하며, 사회·정치적 지평에서 이미지를 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함으로써 “예술을 경험의 모든 측면과 관련시켜 보는 총체적인 접근방식”(38쪽)을 실험해보고자 한다. 이제 그는, 누드화·유화·광고 이미지를 해석함으로써, 특정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시선을 체험하게 한다.
사회·정치적 지평에서 이미지를 분석하기 위해, 존 버거는 누드화와 15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의 유화 작품 속 인물의 시선과, 그 인물과 정물을 바라봤던 시선들을 “보려고” 했으며, 그것의 모방으로서의 광고를 “보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누드화는 남성 감상자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남성의 시선을 의식하는 여성의 의식적인 몸짓이며, 유화 속 인물의 표정은 자신의 능력과 사유재산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며, 정물은 감상자의 촉각을 자극하여 소유하고 있는 듯한 만족감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한편, 광고는 잠재적 구매자에게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타인들에게 선망과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환상 혹은 미래의 약속을 제시한다.
즉, 유화와 광고는 모두 물질적이다. 유화는 작품 속 인물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을 선전하거나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정물을 통해 촉각적 쾌(快)를 선전하는 한편, 광고는 상품을 선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화는 현재의 이미지를, 광고는 미래의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유화의 이미지는 그림 속 인물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 “당시의 실제”를 보여주지만, 광고 이미지는 잠재적 구매자가 “소망할만한 가상의 미래”를 보여준다. 또, 누드화와 유화는 각각 남성과 유화 속 인물을 만족시키지만, 광고는 잠재적 구매자를 영원히 불만족한 상태에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광고의 본령은 이러한 불만족을 통해 자본주의를 존속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누드화는 여성을 감시하고 지배하는 남성적 이데올로기의 존속에, 유화는 사유재산을 신봉하는 부르지아지 집단의 힘에, 광고는 소망하는 미래를 앞당기기 위한 소비능력을 부추김으로써 자본주의의 존속에 기여한다.
"어떤 시기든 예술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다." (101쪽)
그렇다면, 누드화와 유화와 광고를 같은 지평에서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존 버거는, 책의 앞 부분에서 프란스 할스(Frans Hals)의 작품을 화가와 이미지 속 인물들의 상호 시선에 대해 해석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사회관계나 도덕적 규범이라는 측면에서, 아직은 할스가 살았던 사회와 어느 정도 유사한 성격을 지닌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할스의 초상화들이 심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절박함을 지닌 것으로 보이게 된다. (중략) 할스는 자본주의에 의해 처음으로 생겨난 새로운 인물유형들과 그들의 표정을 최초로 묘사한 초상화가다." (19쪽)
그렇다면, 존 버거는, 유럽 유화의 역사를, 자본주의적 문화를 존속하게 하는 광고처럼, 자본의 힘에 의존하는 지배 집단의 이해관계가 표현된 것으로만 보고 있는가. 존 버거는 사회·정치적 지평에서 유화를 해석하면서 이러한 방식으로 보거나 해석할 수 없는 예외적인 위대한 예술가와 예술 작품을 발견한다. 그에 따르면,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존속에 봉사하는 작품은 전형적이며, 이것에 투쟁하는 작품은 예외적이다. 특히, 렘브란트(Rembrandt)는 유화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유화가 배제했던 질문, 즉 “존재”에 대한 질문을, 유화를 통해 표현했다는 점에서 투쟁적이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예외적이며 위대하다. 존 버거는 렘브란트의 첫 번째 자화상인 <렘브란트와 사스키아의 초상>과 노년의 <자화상>을 비교한다. 존 버거에 따르면, 렘브란트는 전자에서는 다른 유화 작품들 속 인물들처럼 자신이 누리는 특권과 행운과 행복을 선전했지만, 후자에서는 ‘존재’에 대한 물음만을 드러냈다.
"렘브란트는 한 노인으로 그 자신을 그려 놓고 있다. 이 존재에 대한 질문, 질문으로서의 존재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노인이 된 그의 안에 있던 화가―그림 속의 노인보다 클지도 모르고 작을지도 모른다―는 전통적으로는 그런 종류의 질문을 배제하고 거부하기 위해 개발되어 왔던 바로 그 매체를 이용하여 바로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발견해낸 것이다." (132쪽)
존 버거는, 이 책을 통해 이미지를 사회·정치적 지평에서 새롭게 마주하게 함으로써, 신미술사(新美術史, New Art History)의 지평을 열었다. 그는, 이미지를,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적·심리적 상태를 드러내는 증거이자 텍스트로 보았다. 또 그는, 비평가를, 미적 취향의 만족도를 높여주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증거하는 이미지를 제대로 “보는” 사람이며, 이를 통해 사람들이 “아는 것”에 빛을 비춰주는, 투쟁하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비평 역시 하나의 예술 장르라고 할 때, 그가 2012년에 한국어로 이 책을 출간하면서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인용했던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하이쿠는, 그가 미술사에서 기도(企圖)한 바를 품고 있다.
부자들을 위해
새 눈에 대해 너절한 글을 쓰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