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당신과 함께 조니워커 블루라벨을 딸 거야
아빠는 작년 3월 뇌종양 수술을 받았다. 이 수술을 받기 약 3년 전, 일 끝나고 직원들과 식당에서 술을 마신 후 일어나려던 참에 쓰러진 적이 있다. 당시에 mri를 찍었어야 했는데. 다행히 금방 회복하셔서 그런 중요하고도 심각한 검사는 남겨 둔 채 퇴원한 걸로 기억한다. 그 사건이 있은 후 3년 동안 아빠는 일상생활을 영위하기에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정년 퇴임 후에도 계속 퇴직자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채용 시험에 응시하고 좋은 점수로 합격해 일을 즐기셨다. 본인의 위치로 봤을 때 이미 다른 직원들과 트러블을 일으킬 만한 레벨을 벗어났으니 퇴직 후 집에 있는 것보다는 본인의 루틴이 일정하고 규칙적이고 심지어 생산적이기도 한 회사 일을 즐기는 게 어쩜 당연한 건 지도 모르겠다. (그 분과 많이 닮은 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오전엔 간단한 운동과 산책을 하고 직장에 출근해서 퇴근 시간인 6시까지 아빠의 일상은 한결같았다. 꾸준히 색소폰 연습을 하고 동호회 모임도 나가고 주말 농장에 직접 가꾸는 텃밭까지 있어 주말엔 그쪽으로도 나가봐야 하고. 여유롭게 들리는 은퇴 후의 삶이지만 그 나름대로 바쁘게 돌아가는 삶이었다.
그런데 나는 몰랐다. 그가 이따금씩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이 간헐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운동신경에 이상이 있다고 느껴질 줄은. 그 당시 나는 스톡홀름에 머물고 있었다. 서울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중에 썼던 연구 논문 성과가 인정되어 얼마간의 장학금을 받고 1년 간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연구 활동을 하게 되었다. 엄마의 연락을 받은 건 3월의 어느 일요일. 1년 넘게 붙들고 있던 공동 논문의 초고 탈고를 마친 후 피곤에 절어서, 한편으론 홀가분하고 개운한 느낌으로 느지막이 낮잠에 절어 있던 일요일 아침. 11시였다.
"아빠가 점심에 직원들과 식사하시던 중 쓰러지셨다. 들고 계시던 숟가락을 먼저 떨어뜨리셨고 얼마 안 있어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지셨단다."
만약 이 같은 상황이 영화나 드라마였더라면, 그다음 클리쉐는 뻔했다. 얼굴은 바로 사색이 되어 당장 전화를 끊고 서둘러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하는 장면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경우에 따라선 그러지 못했다). 얼굴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손도 떨리지 않았다. 동시에 묘한 감정이 일었다. 그가 전혀 보고 싶지 않았다. 분명 이건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장악했지만 도덕도 내게 해당될 때나 그 순간 도덕으로 작용할 뿐. 나는 아직도 이토록 차가운 대기의 스톡홀름이 지긋지긋하다 못해 지옥이라고 여기면서까지 끝내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엄마는 아주 침착하게 말씀하셨다. 일단 수술이 급하니 수술 먼저 진행하고 경과를 지켜보잔다. 너는 네 일이나 잘 마무리 하렴.
아빠의 수술 결과는 좋았다. 뇌에서 떼어낸 종양은 무려 12 cm의 무시무시한 크기를 자랑했지만 단순 종양일 뿐 암이 아니란 사실에 모두 안도했다. 뇌를 비롯한 다른 신체 장기들도 정밀 검사를 했는데 모두 깨끗했다. 수술을 집도한 의사 말로는 종양이 이 정도 크기까지 자라려면 족히 십 년은 걸린다 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아빠는 몰랐다. 그가 모르는데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알 리 없었다. 그 끔찍한 크기의 종양은 직접 본 엄마 말로는 갓 익혀 나온 쇠고기 덩어리 같았다고 한다. 난 즉시 그것의 형태와 컬러를 떠올리곤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그 이미지를 떨쳐 내려고 애썼다. 때마침 가스에 올려놨던 커피포트의 물이 신나게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난 꽤 오랜 시간 동안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었겠지.
스톡홀름에도 작지만 보일 듯 말듯한 새싹 봉우리처럼 봄이 다가왔다. 초고 탈고에 이은 수십 번의 탈고를 거치며 논문을 완성하는 동안 4월이 가고, 5월이 가고, 6월이 왔다. 내가 그 짧은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커피를 마셔댔는지. 수술 때문에 머리카락을 전부 깎은 아빠를 위해 모자 전문점에서 검은색 페도라를 샀다. 그걸 들고 6월의 어느 화창한 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종양을 제거한 후로, 정확히는 병원에서 병명을 안 후로 아빠는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술을 완전히 끊었다. 매일 저녁 식사 때 맥주 한 병과 소주 반 병을 섞어 폭탄주로 드시던 아빠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가족 행사나 기념일 땐 더 즐거워하며 드시던 그 모습도 이젠 영원한 과거 일이 되어 버렸다. 술을 마신 후엔 얼마 지나지 않아 붉그족족해지던 그의 얼굴은 내 기억에 박제가 되어 남았다.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면 그는 평생 지녔던 일상의 긴장과 무게를 잠시 미뤄 놓은 듯 보였다. 한결 가벼워진 미소와 그 아래로 보이던 가지런하고 바른 치아들의 행렬. 멋진 입매와 아름답고 고귀한 콧 선까지. (그는 실로 미남이다)
순진하다 못해 순수해 보였던 그의 유머와 재미없고 썰렁한 농담들이 더 이상 꺼내볼 수 없도록 만들어진 오래된 액자 속 사진처럼 단단히 굳어버렸다.
언젠가 내가 이혼 얘기를 처음으로 힘겹게 꺼냈을 때 가장 가까이서 귀 기울여 들어주던 사람. 어색한 손동작으로 내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준 유일한 사람. 이혼한 딸이 6개월 간 남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여전히 집에서 빈둥거리며 소일거리나 하고 돌아다닐 때도 내게 맥주 한 잔 권하며(혹은 내가 권하며) 너 앞으로의 얘기나 들어보자던. 치킨 한 마리를 작은 안주상 위에 올려놓고 갑자기 동물원 사육사가 되고 싶다는 둥 뜬금없는 얘기에도 그럼 진지하게 알아보라며 웃어주던 사람. 나는 더 이상 그런 그와 술 한잔 할 수 없다. 그리고 오늘따라 그 사실이 날 무척 슬프게 한다. 원래 누리던 모든 걸 수술 후에도 모두 반듯하게 제자리로 돌려놓을 정도로 빈틈없고 강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아도 그 슬픈 사실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언젠가. 그가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목전에 두고 있을 때, 그리고 다행히 내가 그 자리에 함께 한다면 오래전에 막내가 사둔, 조니워커 블루라벨을 함께 딴다. 한 잔의 위스키로 금세 기분 좋아진 그의 붉어진 뺨과 아쉬운 미소가 깃든 얼굴을 다정히 바라보며 말한다.
당신을, 많이 사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