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이가 따로 없다.
온갖 단어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복잡함에 몸서리치던 게 엊그제였건만, 지금은 새하얘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오래된 재생종이처럼 누렇게 바래 버린 느낌이다. 한때는 빽빽하게 적혀 있던 문장들이 있었을 텐데, 누가 지워버린 것처럼 텅 비어 버렸달까.
쓰고 싶은 글감들이 너무 많을 때는 머리가 터질 것 같더니, 막상 바쁜 일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시간이 생기고 나니 그것도 그것대로 공허함을 가지고 온다. 이제는 무언가 떠올려 보려 해도 까만 종이 위에 까만 물감만 덧입히는 것처럼, 무용한 시간만 보내고 있을 뿐이다.
시간이 생기면 꼭 쓰고야 말겠다 다짐했던 것들은 물방울을 쥔 손아귀처럼 손가락 사이로 모조리 흩어지고, 겨우 하나를 붙잡아 보아도 곧 갈 길을 잃은 미아처럼 단어들 사이에서 헤맬 뿐이다. 아마 머릿속 어딘가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눅눅한 창고 구석에 새카맣게 곰팡이가 피어 버린 채로 쌓여 있는 종이 더미처럼. 다만 지금은 그 위에 덮인 먼지가 두꺼워서 보이지 않을 뿐일지도 모른다.
나는 본디 자존심은 강하지만 자존감은 낮은 사람이다. 그래서 작렬하는 패배감과 질투심을 적당히 피부 속으로 감추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채 꽤나 그럴싸하게 은폐하며 살아왔다. 그 못난 마음을 겉으로 꺼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여기면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던가.
그 말은 꼭 나를 두고 만들어진 말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와 별반 차이도 없어 보이는 누군가가 인정받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 졸렬한 마음이 끝내 뒤틀리고야 만다. 부러우면서 밉고, 밉다가도 곧 그런 감정을 가진 나 자신에게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난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면 될 것을. 부러우면 노력해서 내 손에도 쥐면 될 것을.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지도 못하는 내가 참으로 모자라 보인다.
요즘은 그런 감정들이 더 자주 느껴진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인생이라는 것이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잠깐쯤은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영원히 도망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편안해질 수 있겠지.
가장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둘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내 이야기를 구구절절 허심탄회하게 꺼내 보이며 속을 모조리 드러내 본 적은 없다. 내게 돌아올 누군가의 잣대와 조언 혹은 위로가 듣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나는 그저 지금 내 마음이 이렇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본래 인간은 홀로 태어나 홀로 살아가는 독립적인 존재라고들 하지만, 아주 가끔은 그 사실을 잊고 지낼 만큼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상호작용'이라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차라리 피하고 싶어질 때도 있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나는 지금 어떤 위로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해결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가만히 내 이야기만 들어줬으면 할 뿐이다. 어찌 보면 알량하기 짝이 없는 얄팍한 마음이겠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은 요즘 모두 바쁘다. 그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따라 더욱 고립된 기분이 든다. 브런치로 돌아왔어도 한참 전에 돌아왔어야 했을 일정이었으면서도, 사실은 그런 못난 마음들을 가진 것을 들킬까 봐 컴컴한 연못 속에서 숨을 참으며 삭혀왔음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도 했고.
웃기게도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고 싶은 마음. 그런 이중적인 감정이 내 안에서 계속 부딪힌다.
요즘은 정수리가 자꾸 뜨겁고 아프다. 그걸 인지하고 나니 이번에는 또 다른 감정이 올라온다. 이렇게까지 지쳐 있는 나 자신이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질투를 하고,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그 와중에 또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긴다. 그 모든 감정이 뒤엉켜 있는 채로 나는 오늘도 이렇게 멍하니 앉아 있다.
농촌의 풀밭을 걷다 보면 도꼬마리 씨앗이나 도깨비풀 따위의 식물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짓자락을 붙잡고 있는 경우를 종종 겪게 된다. 차라리 내 감정들이 그것들이라면 툭툭- 손쉽게 털어낼 수 있었을 것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면서 그것에 무에라고 쉽사리 벗어내지도 못하고 손에 쥐고 있는 것인지.
오늘도 나 자신에 대한 '이해'라는 감정을 포기하고야 만다.
그리고 이렇게 지리멸렬한 글자들의 나열 속에,
간신히 토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