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반에 하나쯤은 있었던 만화 잘 그리는 친구
새해 들어 처음으로 쓴 일기를 보면 하나같이 '올해 들어 첫 일기이구나' 하는 식상한 얘기로 시작되었는데.
영락없이 지금도 키보드에 양 손을 올리자마자, '여기에 올리는 첫 글이구나' 하는 식상한 얘기로 시작할 뻔했다. 아. 이미 그렇게 시작되어버린 것일까.
수업이 끝나면 저마다 피아노니 컴퓨터니 한두 가지씩의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이 준비되는 냄새를 맡으며 TV 앞에 모여들고, 지방에서 이사 온 친구는 '우리 집엔 SBS가 안 나왔어'라고 하던 시절. 같은 요일 같은 시간대의 피구왕 통키와 나디아로 파벌이 나뉘고, (주로) 남자아이들은 로보트물과 (주로) 여자아이들은 변신소녀물에 심취하던 때부터. 세일러문이나 마법소녀 리나의 세계관이, 주인공의 이야기가 길어지고 등장인물이 늘어남에 따라 점점 확장되어가며 마치 나의 머리가 굵어짐과 매한가지로 성장함을 지켜보던 무렵. 만화대여점에 들락거리며 책가방에 숨겨온 만화책을 돌려보며 다음 권은 누가 가지고 있느냐고 친구들 교실을 전전하고, 스크린톤이니 펜촉이니 없는 용돈 쪼개가며 장만하곤 정작 아까워 파일에 곱게 끼워 모셔놓았던 즈음에도. 학교 앞 문구점에서 일본 만화 일러스트의 사진을 인화해 한 장에 오륙백원씩 파는 것들을 펀치로 구멍을 뚫어 다이어리에 끼워두거나, 아카니 코믹이니 순례하면서 코팅된 만화 캐릭터 그림을 사서는 가방에 달고 다니던 때에도.
초등학교 (당시엔 국민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한 반에 하나쯤은 있었던 '만화 잘 그리는 친구'였다. (아직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반 친구들은 으레 그런 친구에게 마치 고명한 작가에게 작품을 의뢰하듯 그림을 그려달라 졸랐고, 그러면 그림 그리는 친구는 으레 우위에 있는 사람마냥 우쭐해졌으며 ("아냐아냐 이건 ㅇㅇㅇ가 먼저 부탁한 거야"... 이렇게), 다른 반에 그림 잘 그리는 아이가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절대 먼저 말을 섞으려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그림이 훨씬 더 멋지다고 내심 뿌듯해하곤 했다.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닌 통에 초등학교 무렵의 그림은 별로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진지하게 미대 진학을 꿈꾸었다 좌절하여 국어 선생님이 되셨던 어마마마께서 '귀신 딱지 같은 그림'이라고 꾸중하셨던 것으로 미루어 그다지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그림은 아니었던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비록, 우리 어마마마께선 만화를 싫어하시는 데다가, 장차 만화가 말고 뭔가 그럴듯한 직업을 가지게 될 것임에 틀림이 없는 당신의 따님께서 열중하여 만화 나부랭이를 그리는 것이 탐탁하지 않으셨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아홉 살이 될 때까지 어마마마께서는 어느 동네로 이사를 가든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셨는데 어느 날엔 새로 다니게 된 피아노 학원에서 선생님 앞에서 나를 두고는, '만화책을 너무 좋아하니 학원에서 만화를 못 보게 해달라'라고 당부하셨던 기억이 있다. 집에 있던 몇 권 안 되는 만화책은 외우다시피 보고 또 보고 했으며 (결국엔 어느 날 다 버리셨다) 내 취향을 저격하여 어마마마께서 장만해주셨던 세계사 만화책은 (이것 또한 어느 날엔가 다 내버리셨는데) 못 본 지 2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장면 장면이 생생할 정도로 읽고 또 읽곤 했었다. 어마마마께선 그 성공에 힘입어 만화로 된 수학책을 사주셨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수학자들에 관한 재밌는 에피소드만 쏙쏙 골라 읽고 수학 공식이니 원리니 하는 것은 빛의 속도로 건너뛰었다.
이토록 좋아하기도 하고, 잘하기도 하고 (적어도 우리 반 안에서는), 주위 친구들의 격려에 힘입어 나는 종종 만화가라는 직업에 나 자신을 대입해보곤 했다. 저 혼자 스토리를 구상해서 이야기가 있는 만화를 그리고, 그것이 만화로 출판되어 인기를 얻거나 만화영화로 만들어지거나 하는 것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래도 '너는 나중에 만화가 할 거야?'하는 친구들 물음에 나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먹고사는 일은 좋아하는 일 하는 거 아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