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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라 클래스 Jan 03. 2020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를 읽고

세상을 다르게 또는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



류시화의 많은 책, 번역서 중에서 내가 제대로 읽은 책은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였다.

꽤나 어려운 책이었지만, 삶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을 선물해주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류시화를 팔로우를 하게 되었고

종종 그의 글을 읽었었는데, 아, 이분 참 글을 한땀 한땀 이쁘게 쓰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읽게 된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분명 “아, 그렇구나! 그래! 그렇지~” 하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 내용을 외워서 적기에는 나의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고, 너무 빠르게 읽어서 바로 생각이 막 나진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대략적인 내 느낌을 적어보고, 그 이후에 내가 좋아서 밑줄을 친 내용을 적도록 한다. 



[읽고 나서의 느낌, 생각 정리]


아,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문장들이 많았다. 

세상을, 어떤 사건을, 그리고 사람을 다르게 보는 이야기들이 특히 많았다. 


우화를 정말 많이 알고 있구나, 그리고 경험도 정말 많구나

그 많은 것들 중에 서로 맞는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서 풀어내는구나


명상을 해보았고, 그와 관련된 글과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들었기에

삶을 따뜻하게, 현명하게 바라보는 내용이 많았다. 

저자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지내왔는지 꽤나 잘 상상이 되었다. 


세상 못되게 살지 말고, 집착하지 말며, 보다 넓게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아프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더 나은 일이 오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연이 참 많다. 그리고 삶의 아름다움, 즐거움, 경의로움을

잊지 말고 현재를 잘 살아가라. 


어찌 보면 좋은 말 대잔치 이기도 했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그리고 책의 좋은 글귀들은 정리를 통해서 오래도록 내 머리에, 나 마음에 담아두게 될 것이다.

그럼, 나 또한 저자처럼 좀 더 푸근한 마음,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지? 



[나에게 참 좋은 글귀들]


시를 쓰고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경험해야 하는 일들로 여겨지고 삶의 의지가 다시 솟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 길에 이르는 과정을 섣부른 충고나 설익은 지혜로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 

삶의 문제는 삶으로 풀어야 한다. 


“새는 날아서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도 나는 법을 배운다.”


몸이 칼에 베이면 육체적, 감성적, 영적 치유 시스템이 즉각적으로 동원되어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살아난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우리를 치료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쉬는 매번의 숨마다 너무 맛있고, 너무 좋다.”


“다시 돌아가서 암소를 절벽 아래로 밀어뜨려라.”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했고, 새로운 기술들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지나간 길이 아니라 지금 다가오는 길이다. 


“나는 이메일이 없소.” 

“아마도 사환으로 일하고 있겠지요.”


글쓰기가 너무 어려워서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


꼭 필요하지 않은 일과 만남들이 줄어들면서 기쁨은 늘어났다. 소박함은 정신을 창조한다.


“나는 너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좋아.” I like me best when I’m with you.


고정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수는 학생을 가르칠 때만 교수이다.

그가 의사, 교수라는 명사로 자신을 고정시킨다면 그는 자기규정에 갇혀 존재가 가진 수많은 가능성과 역동성을 잃는다.


일 년 동안 장관을 지낸 후에 평생 장관님으로 불리길 원하는 사람도 있다. 


암에 걸린 것이 확인되는 순간 자신을 암환자와 동일시하며, 암환자로 살다가 암환자로 생을 마친다.

그것이 암에 걸리는 일보다 더 불행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나무는 걱정을 걸어두는 나무입니다. 문제와 걱정들을 집 안의 아내와 아이들에게까지 데리고 갈 순 없습니다.”

“아침이 되면 문제들이 밤사이 바람에 날아갔는지 많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수행이 잘되든 안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명상하려고 하는 의지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전 생애에 걸쳐 수시로 마라와 마주쳤는데, 한 번도 마라를 무시하거나 때려눕힌 적이 없다. 

“어서 와, 마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나는 잠시 두려울 뿐이지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며, 잠시 슬플 뿐이지 슬픈 사람이 아니다. 


“또 만나! 곧 다시 올 거야!” 그러나 그런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이 유리잔이 이미 깨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이해해야 한다.


지금 사과를 한입 깨물고 있다면, 당신은 마지막 사과를 먹고 있는 것이다. 


인내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인내는 앞을 내다볼 줄 알고 살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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