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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Aug 24. 2020

산티아고 순례길 - 본연의 의미, 원초적인 의구심

6월 15일 - 사모스(Samos)

사모스 수도원을 보기 위해 내려가는 산. 밤새 내린 비 때문에 고작해야 10m 남짓인 가시거리를 만든 구름 숲이 생겼다. 해가 중천에 뜰 시간이 지나도록 세상은 여전히 구름에 휩싸여 본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구름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분이다.


사실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에 머무르기로 했던 건 지난해의 여운 때문이었다.


오 세브레이로에서 머물고 출발하던 아침, 운해가 산을 뒤덮어 마치 새하얀 바다와 섬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걸음을 멈추고 연신 사진을 찍기 바빴다. 오른쪽, 왼쪽, 위, 아래 가릴 것 없이 사진을 찍고 또 찍어댔다. 내가 산에 있는 것인지 바다에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신선이 사는 곳이 이런 곳일까 싶었다.


이번에도 그 장관을 보고 싶다는 간절함은 이뤄지지 않았다. 비가 온 탓에 짙게 내린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새하얀 그물에 갇혀 질퍽거리는 흙길을 밟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2014년(좌) 2015년(우). 같은 장소 다른 모습. 까미노는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는 길은 멀고 험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단 둘이 걷는다는 낭만도 나쁘지는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미래를 헤쳐 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미리 내어다 보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렇게 산을 내려와 뜨리아까스뗄라(Triacastela)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다시금 기로에 섰다.


더 나아가 원 목적지인 사모스로 갈 것이냐, 아니면 이대로 걸음을 멈출 것이냐.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쉬고도 싶은 참 복잡한 마음이었다. 오 스브레이로에서 이미 20㎞ 가량 걸어온 데다 사모스까지는 12㎞가 남은 상황. 결코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산티아고 순례자 동상.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결국 우린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이제는 멈출 수 없는 사모스를 향한 길. 힘겨운 걸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 실없는 농담을 나누고 서로를 북돋아가면서 열심히 걸어갔다.

그리고 이내 도착한 사모스는 포기하지 않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우리는 사모스 수도원(San Julian de Samos)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 머물렀는데, 아름답고 웅장한 수도원의 위용에 사로잡혔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기에 수도원과 같은 종교시설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 머물게 되면 그 의미가 완벽하게 부합하기에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알베르게에는 규모에 비해 의외로 적은 수의 순례자들이 머물고 있었는데, 그중 한국인 순례자들과 함께 성당 투어를 가게 됐다. 그중에는 신부님(순례길 본연의 의미대로 순례를 위해 오신 분이었다.)이 계셨는데 종교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셔서 정말이지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신부님을 비롯해 한국인 순례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다 보니 ‘순례’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이 이슬람 국가에게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벌였던 국토 회복 운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이다. 야고보(스페인명 Santiago)의 무덤이 발견되고 순례 행렬이 시작되면서 가톨릭 세력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었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석. 이제 146km가 남았다.

물론 최근에는 본연의 이유인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 힐링 여행을 위해 찾는 사람이 많지만,  진정한 의미인 ‘순례’를 위해 걷는 가톨릭 신자들을 만나게 되면 ‘아, 이곳이 순례길이었지.’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신을 믿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간혹 가다 만나는 ‘진짜’ 순례자들의 신앙과 믿음이 유독 무겁게 다가온다. 종교는 그저 역사일 뿐인 나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공간과도 같다.


나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은 어떤 의미일까. 이제 산티아고 데 꼼뽀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까지 100㎞ 가량 남은 시점에서 원초적인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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