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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해정 Dec 27. 2016

단양 - 남한강 굽이굽이
온달의 정기를 따라

청소년 인문 매거진 <유레카>(2016년 4월 발행)

산과 강이 서로를 품은 그곳, 단양은 온달의 고장이다. 우리에겐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사랑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진 고구려 장군 온달의 이야기가 지역 곳곳에 스며있다. 

이름도 아름다운 그곳 단양에서 온달의 발자취를 따랐다.


임금이 말했다. “그렇게 계속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낼 거다.” 곧잘 우는 공주를 달래기 위해 했던 임금의 농담은 현실이 됐다. 숙녀가 된 공주는 좋은 혼처를 마다하고, 아버지가 농담으로 말했던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고 공주의 훌륭한 내조에 힘입어 온달은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고구려의 명장이 됐다. 


어렸을때 누구나 한 번쯤은 읽었던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 이 때문일까? 온달은 역사 속 그 어느 장수보다도 친근하다. 바보에서 장수까지 드라마틱한 생애를 살았던 그의 자취를 따라 단양에 다녀왔다.


온달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 단양

북쪽으로는 강원도 영월군이, 남쪽으로 경북 예천과 문경시가, 동쪽으로는 경북 영주, 서쪽으로는 충북 제천과 접한 단양은 굽이치는 남한강과 산, 계곡들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한쪽에는 강이, 다른 한쪽에는 기암절벽이 시선을 압도하는 이곳을 지나려니 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사랑했는지 알 것만 같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묵직하고 평화로운 지역이지만, 사실 이곳 단양은 삼국시대 군사적 접경지이자 요충지였다. 삼국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 초기에는 백제의 영향권에 있다가 고구려가 남하하면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이후 힘이 세진 신라가 다시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뺏고 빼앗기는 과정에서 많은 전투를 치렀을 이곳 사람들. 문득 그들에게 이 아름다운 풍광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온달의 실제 모습을 찾아

단양 버스터미널에서 구인사를 지나 영춘면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온달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온달관광지가 있다. 단양군이 온달산성과 온달동굴, 드라마세트장 등을 묶어 관광단지를 조성한 것. 단지 입구에는 귀여운 온달장군과 평강공주를 캐릭터가 찾아오는 손님들을 반긴다.


온달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온달에 관한 기록은 빈약했다. <삼국사기> 온달열전이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다.


온달산성 가는 길에 보이는 남한강 도담삼봉
담양에 들렀다면 이곳 사인암도 둘러보길 추천한다
“얼굴이 험악하고 우스꽝스럽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안이 가난해 항상 밥을 빌어서 어머니를 봉양했다. 떨어진 옷과 신발을 걸치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므로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그를 ‘바보’라 불렀던 것은 허름한 옷차림과 못생긴 얼굴 그리고 착한 천성 때문이었으리라. 어쨌든 온달은 가난하지만 효심 깊고 착한 청년이었고, 평강공주를 만나 학문과 무예를 접하며 당대의 뛰어난 장수가 된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고구려에서 말이다.


학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는 시대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문자왕 이후 고구려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신라 진흥왕에게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겼고, 내부적으로는 귀족들의 다툼으로 몸살을 앓았다. 북주와 돌궐의 침입 위험은 고구려를 더욱 위태롭게 했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해야 했던 평원왕은 새로운 세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기존의 부패하고 썩어빠진 귀족이 아니라 참신한 새 세력이 말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발탁된 인물 중 하나가 온달이었다. 온달은 3월 3일 국가적인 대제전에서 뛰어난 사냥솜씨로 평원왕의 눈에 띄었다. 이후 요동에서 있었던 후주 무제와의 전투에서 온달은 크게 활약했고, 이를 가상히 여긴 왕은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라며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벼슬을 내렸다는 것이다.


온달산성에 오르다

온달산성은 온달관광지 드라마세트장 뒤로 난 길을 따라 900m 정도 올라가면 나온다. 그리 높진 않지만 경사가 있어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다. 산 중턱쯤 정자 하나가 나를 반긴다. 이곳에도 온달과 관련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온달의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옮기는데, 사람들이 아무리 힘을 써도 움직이지 않았단다. 이에 평강공주가 “생사가 이미 결정됐으니 한을 풀라”고 어루만지자 비로소 들 수 있었다는 것. 이 이야기를 뒤로한 채 다시 한발 한발 옮긴다.


30~40분 정도 지났을까. 탁 트인 파란 하늘 아래 그렇게 보고 싶었던 온달산성이 놓여 있다. 성벽의 길이는 972m. 다른 산성에 비해 크거나 웅장하진 않지만, 하나하나 돌을 쌓아 견고하게 구축한 산성의 모습을 보니 고구려인의 단단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산자락을 말발굽처럼 감싼 듯한 온달산성은 경사면에 지어져, 성벽 안에서 보면 높이가 1~4m밖에 안 되지만 밖에선 6~7m, 아주 높은 곳은 10m에 이른다. 성벽에서 내려다보이는 단양의 모습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북쪽으론 산자락을 휘돌아 가는 남한강 물줄기가 보이고, 남쪽으론 백두대간의 소백산 줄기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온달산성의 독특한 방어·공격시설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온달산성의 북문은 별도의 덮개를 설치하지 않은 개거식으로 보통의 성문과 다를 바 없지만, 문밖은 공격하기 힘들 정도로 경사가 가파르다. 동문과 남문은 현거식이라는 특이한 형태로 되어 있는데, 지상에서 성벽 높이의 절반까지 돌을 쌓았기 때문에 위에서 사다리나 문을 내려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사실 온달이 죽음을 맞이한 곳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삼국사기》에서 온달이 죽은 곳으로 등장하는 ‘아단성’이 단양의 온달산성이냐, 서울의 아차산성이냐 하는 논란이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기 힘들지만 이곳 온달산성 일대엔 온달에 얽힌 전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단양 사람들이 누구보다 온달을 사랑하고 추억했으며, 단양이 온달의 향취가 묻어나는 곳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온달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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