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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해정 Jan 23. 2017

남한산성,
그 참담했던역사의 현장을 가다

청소년 인문 매거진 <유레카>(2016년 12월 발행) 

시간을 거슬러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380년 전으로 떠나본다. 인조는 청의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날도 오늘처럼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었다. 인조는 이 바람을 맞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상에 오르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주 가깝게 제2롯데월드 타워가 보인다.영화 <반지의 제왕> 속 ‘사우론’이란 별명은 누가 지었는지, 참 잘 지었다.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 내려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평일 오전 남한산성행 버스 안에는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등산객이 대부분이었다. 성안으로 금세 들어갈 것만 같았던 버스는 가파른 왕복 2차선 도로를 달려 오른다.


길이 좁고 꼬불꼬불해서 혹시나 차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난다. 도로를 닦고 포장해도 이 정도인데, 380년 전 도로상황이 어땠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도로라는 말도 무색하다. 이 험한 길을 인조는 매서운 겨울바람을 가르며 올랐을 것이다. 청의 군대를 피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피난길, 인조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고립된 성안에서 47일 간 항전하다

1636년 음력 12월. 청의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눈보라를 몰고 한양으로 진격했다. 병자호란이었다. 정묘호란을 겪은 지 불과 9년 만에 또다시 침입을 받은 것이다. 인조는 황급히 수비 부대를 편성했지만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청군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얼마지 않아 청의 군대가 남한산성에 당도해 산성은 포위되고 말았다. 전국의 구원병들이 군대를 일으켰지만 모두 남한산성에 당도하기 전 청군에 의해 궤멸했다. 식량은 점점 떨어졌으며, 산속의 혹독한 겨울 추위로 사망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도성 밖에는 시신이 길에 널렸고, 살아남은 아이들과 노인의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에 가득했다.


여러분이 만약 인조였다면 이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나라의 자존심을 이유로 죽음을 불사했을까 아니면 항복했을까. 인조는 항복하는 길을 택했다. 더는 백성들의 피해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서문을 통과해 인조가 항복하기 위해 갔던 길을 따라가 보았다. 성문을 나와 아래로 향한 길을 내려다보니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쓸쓸히 걸어가는 인조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면서 스산해진다.


전쟁이란 상처를 기억하고 있는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고대로부터 이어진 우리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초창기에는 백제의 옛터가 있었고,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한 후 당나라와 싸울 때는 천초기지 역할을 했다. 고려는 이곳에서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기도 했다. 인조는 이를 보전하기 위해 둘레에 약 12km에 이르는 산성을 대대적으로 쌓아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했다. 성곽 내부는 평상시에는 사람이 사는 마을이었지만 전시에는 군사요충지의 기능을 했다.


역사 속 전쟁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남한산성.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역사 속 설움들이 크게 느껴진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요즘, 새삼스럽고 심각하게 나라 걱정을 해보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그때처럼 겨울의 남한선성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남한산성의 탐방로는 모두 다섯 개로 나뉘어져 있는데 모두 둘러보기 어려우니 코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오르면 좋다. 연말과 신년 즈음엔 해돋이를 보러 온 사람들로 남한산성이 활기를 띤다. 슬픈 역사 이야기로 시작해 마무리 멘트론 조금 어색하지만, 남한산성 근처엔 맛집이 아주 많다. 겨울은 추우니 칼국수는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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