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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름 Nov 27. 2020

서양 회화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이유



유년시절에 내가 부모님과 가장 많이 갔던 곳을 꼽으라면 미술관이다. 약간 과장이 섞인 이야기지만 음식점이나 마트를 제외하면 미술관이 맞다. 거의 매주 주말에 과천 현대미술관이나 서울 시립 미술관 둘 중에 하나는 갔다. 과천 현대미술관은 우리 집과 우연찮게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자주 갈 수 있었다. 집 근처에서 치킨이나 피자를 사서 현대미술관에 가서 치킨을 먹고 그랬다. 치킨이 식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리모델링 전에 있었던 푸드코트에서 팔았던 어묵이 정말 맛있었는데 이제는 팔지 않아서 아쉽다. 아직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리모델링 후에 미술관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 팔았던 파스타가 정말 맛있었다. 중학교 졸업하고 미술관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을 먹었을 정도였다. 물론 당시 지역에 있는 모든 중학교가 동시에 졸업을 하는 바람에 동네에서 먹으면 번잡하다고 그냥 가까운 미술관에 간 것도 있었다. 서론이 길었지만 미술관에 가서 먹기만 하고 오지는 않았기에 나는 삶에서 미술과 예술을 늘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 꼬마애에게 예술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름다운 것들이 좋았다. 미술관에 가면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또, 내가 어렸을 때는 해외 유명 작가의 유명 작품을 들여오는 것이 미술관들의 주요 사업이었기 때문에 교과서에서 만나는 작품들을 꽤 많이 실제로 볼 수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주로 서양 회화가 주를 이루는 순수 회화를 정말 좋아했다. 그들의 굿즈를 사고 언젠가는 미술을 보러 직접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성인이 되고, 머리가 조금 크고 나서부터 서양 회화가 내가 알던 환상적인 아름다운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동양인 여성인 내가 서양인 남성의 시각으로 보는 세상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서양인 남성이, 그것도 지금보다 훨씬 더 옛날에 묘사하는 여성의 위치나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알아가면서 더 이상 서양 회화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들을 싫어하기보다는, 그동안 사랑했던 것들이 나를 배신했다는 게 내가 느낀 감정에 가깝다. 특정한 표시나 의상을 입으면 그들이 창부였을 것이다, 포르노그래피로 쓰였던 그림이 지금은 칭송받는 예술작품이 되어 미술관에 걸려있는 그림, 그림에 그대로 남은 당대 여성과 남성의 위치 같은 것들이 고통스러웠다. 말하자면 내가 사려고 했단 환상은 이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더 이상 환상을 사는 것을 포기했다.




특히 바로크나 로코코 시대의 그림을 제일 못 견뎌하는데 그 당시에도 낭만주의라며 그 당시의 환상이 녹아있는 것을 마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생전 처음으로 앞을 볼 수 있게 된 사람처럼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다. 서양 회화에는 나체의 사람, 특히 여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원래 그것이 신성한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서 인 줄 알았다. 여태 그렇게 믿고 작품을 관람해왔는데, 미술사를 배우다가 나신의 여성이 그려진 그림은 당대에 포르노그래피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내가 믿었던 세계 -아마도 환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예술가의 여성 편력도 예전에는 예술인이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순수예술을 신봉하지 않는다. 순수예술이 아름답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들이 신성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은 다 똑같은 선 위에 있는 예술이다. 대중예술이든 순수예술이든 어떤 이유로 만들었건 간에. 취향이 나뉘어 어떤 것을 더 소중히 여길 수는 있지만 예술의 서열화를 절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 전시를 가지 않게 된 것도 이 이유가 크다. 전시에서 작품을 신성하다는 태도로 그들을 모시는 태도와 내가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에 거리가 생겼다. 좋아하는 작가라면 기꺼이 갈 의사가 있지만 보통은 전시회에서 작가를 알아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예술에 대한 입장이 확고한 편이라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때 그가 서양 회화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이면 말을 아끼게 되었다. 현대 미술로 왔을 때는 이야기가 또 달라지는데, 서양 회화에 대한 사랑을 떨쳐내면서 미술에 대한 사랑도 많이 떨쳐내어 지금은 종합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또 바뀔 수도 있다. 좋아하는 것이 금방 바뀌기도 하니까. 하지만 앞으로 다시 모네의 작품 앞에서 눈물 흘릴 날은 내게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 오르세를 다시 찾아갔을 때 보고 눈물 지었던 그 작품 앞에 다시 서서더 이상 서양 회화를 사랑하지 않지만 모네의 그림은 여전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은 또 사랑대로 흘러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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