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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름 Dec 29. 2020

'너는 신중하지 못해'를 말해도 될까


너는 신중하지 못하다. 요즘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너는 마스크를 썼어야지. 너는 클럽에 가지 말았어야지. 너는 위화감을 조성하지 말았어야지. 너는 가만히 있었어야지. 물론 정말로 잘못을 시정해야 할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분명한 건 타인을 '판단'하고 품평하는 것이 점점 사회에 만연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로 들어오면서 타인의 사생활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이유로 공개되는 것에 대한 면역이 사라지고, 타인의 행동을 평가하는 것에 서슴이 없어졌다. 공동체가 서로를 감시하는 것이 한결 심해졌다고 할 수 있다. 피치 못할 상황이고, 어떤 때에는 그것이 대단히 도움이 될 수 있으나 그에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타인을 우리가 멋대로 '판단'하고 '평가'내리는 일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자기 소개하는 시간에 나는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10중 8은 'I do not like people who are judging others'라고 대답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품평하는 사람들이 싫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타인을 판단하는 것이 나쁘다는 사고를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가면 늘 서로의 옷과 가방 그리고 외모를 암묵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에서 학교를 다니던 아이는 아마 그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야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남에게 필요 없는 신경을 써 타인의 행동을 평가하고 품평하는 사람들이 싫다는 말이었구나. 누군가의 눈치를 보게끔 만드는 게 싫다는 말이었구나.



한국은 눈치의 사회다. 뭘 가져오라고 해도 그걸 가져오라고 말하기보다는 나 그거 먹고 싶어,라고 말하는 문화가 있으며 누군가 필요한 게 느껴지면 눈치껏 알아서 행동하는 것이 일머리가 있다고 말한다. 옆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요새는 잘 알지 못하지만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기면 소문이 발 없는 말처럼 빨리 달리기 일쑤다. 폐쇄된 사회일수록 심한 것 같다.



원래도 이런 사회에, 코로나로 인해 타인의 행동을 평가해도 되는 명분까지 곁들여졌으니, 사람들은 말을 이리도 얹고 저리도 얹으며 너는 신중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흔히 공인에게 부여되는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 위에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책임을 얹는다. 안 그래도 실수에 너그럽지 못한 사회에서 한 번 미끄러지면 그대로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사회가 되었다. 공인의 실수를 인정해주자는 얘기가 아니다. 언제나 말하는 것처럼 잘못한 건 잘못한 것이고 그의 경중에 따라 처벌을 받는 것이 맞지만, 만회할 수 있을 정도의 실수를 한 사람에게 마치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스스로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타인의 실수에 너그럽지 못한 사회를 조성하면 사회는 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는 와중에 티끌만큼의 실수를 하지 않을까? 아니다. 하다못해 길가에 실수로 아이스크림이라도 흘리겠지. 우리 모두는 실수를 하면서 사는데, 마치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스트레스를 풀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누군가 잘못을 하면 달려다 득달같이 빗자루로 패는 걸 올해 너무나 많이 봤고, 그건 지양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게 심하면 마녀사냥이 된다.



모두의 삶이 있고, 각자의 삶에서는 자신이 주인공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당신만을 위해 돌아가지 않는다. 당신이 세상을 보는 기준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88만 원 세대를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잠에 들어도, 누군가는 불로소득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로소득으로만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죽일 놈이거나, 최저시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 귀에 그 얘기가 전혀 들리지 않아야 하거나,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거나, 많이 버는 사람이 반드시 더 질이 좋은 삶을 살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생이 있을 뿐이고, 모두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니, 애꿎은 곳에 가서 당신은 내 입장도 생각해줘야지! 내가 기분 나쁘잖아!라는 의미로 '너는 신중하지 못하다'라는 말을 남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해야 할 때가 있고, 해야 하지 않을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이 코로나로 인해 평균 수입이 감소해서 슬프지만, 그래도 일이 있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을 한 누군가는 국민의 평균 수입보다 많이 벌지도, 않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최저임금을 받지는 않는다. 이 사람에게 너는 최저임금 받고 일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신중하지 못하다고 경솔하다고 얘기해도 되는 걸까? 이 문제는 보다 근본적으로 체제와 국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인보다 잘 버는 모두에게 손가락질하면서 타인을 판단하고 깎아내릴 자격을 부여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고민이 있고 대부분 지금보다 나은 상태를 갈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것을 고민하고 누군가에게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타인과 비교하는 삶을 산다면. 거기에 평가를 곁들인다면 아주아주 피곤한 생이 되지 않을까. 피곤한 생이 될 뿐 아니라 그건 본인과 남을 괴롭히는 일이다. 마녀사냥은 중세에 시행된 것만으로도 그 잔혹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현대에 엄지로 그것을 되풀이하는 일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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