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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 Sep 28. 2020

내가 겪은 97년도 뉴질랜드 인종차별

만 5살에 겪은 나의 첫 백인 인종차별

뉴질랜드는 지금도 전체 인구가 500만 명이 채 안 된다.


뉴질랜드로 이민을 처음 간 것이 내가 만 4살일 때다.


이 세상 끝자락에 있는 뉴질랜드는 정말이지 ‘청정’ 그 자체인 나라다.



내가 뉴질랜드를 처음 갔을 때에는 아시아인이 정말이지 극 소수에 불과했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아무도 모를 때다. 그러니까, 아무리 내가 “I’m Korean! (아임 코리안!)”이라고 울부짖어도 아무도

‘코리아’를 몰라 갸우뚱하던 시절이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우리 가족의 첫 집은 웰링턴의 Tawa (타와)라는 작은 마을의 집이었다.


방 3개의 벽돌집이었는데, 우리 옆집에는 한 노부부께서 사셨다.


흰머리에 백옥 같은 피부의 노부부였는데, 아직도 이름이 기억날 정도로 나의 어린 시절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같은 존재였다. Steve (스티브)와 Carol (캐럴)은 그들은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러 온 젊은 한국은 부부를 매우 애정 했다. 우리 가족은 간혹 그 집에 놀러 가 Afternoon Tea도 먹고, 머핀과 쿠키도 먹곤 했다. 캐럴 할머니는 내 검은 머리를 유독 좋아했다. 내 머리를 파란 리본으로 자주 묶어주시곤 했다.


뉴질랜드는 만 5살에 학교를 시작한다.


아직도 그 풍경이 눈에 선하다. 한 반에 약 30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는데, 나만 아시아인이었다. 가뜩이나 말도 안 통하는데, 나랑 다르게 생긴 파란 눈의 아이들이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때의 나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해서, “너 너무 예쁘다~” 라던가, “너 정말 잘생겼다”라는 말을 한국어로 같은 반 친구들에게 하곤 했는데…… 당연히 아무도 못 알아들었다.


내가 학교를 가기 싫어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같은 반 친구(라고 쓰고 원수라고 읽는다) 한 명 때문이었는데. 이 새끼, 아니 이 친구는 뼛속까지 백인우월주의였다. 그 친구는 나만 보면 자신의 두 눈을 쭉 찢어, “You Chinese!”라고 놀리곤 했는데, 어릴 때부터 정의에 불타던 나는 “No, I’m Korean!”을 외치 곤했다. 근데 그럴 때마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가 친구가 나에게 혀를 내민다거나, “Ching Chong Chong (칭총총)”이라며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거다 (지금 만나면 정말 찐 결투를 신청할 텐데..)


5살 나에게는 세상 가장 억울하고 화가 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그림 시간이 돌아왔다. 슈퍼 코리아 한국의 조기교육의 수혜자인 나는 그날, 반에서 가장 예쁜 그림을 그렸다 (뿌듯.) 나의 그림을 보고 선생님과 모든 아이들이 나에게 박수를 쳤다. 그렇게 뿌듯해함도 잠시, 그 싹퉁머리 없는 자식 반 친구가 연필로 나의 왼쪽 눈 끝머리를 찔러버렸다.


순간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생님도 너무 놀라 소리를 쳤고, 약 10초 후부터 왼쪽 눈에 어마 무시한 고통이 밀려왔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양호실에서 눈을 소독하고 있었다. 조금만 잘못 찔렀으면 실명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전화를 받은 우리 아빠, 엄마는 놀라 뛰어왔지만 영어가 잘 되지 않아 별다른 항의를 할 수 없었다. 일단, 조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내 손을 붙잡고 우리 엄마는 엉엉 울었고, 우리 아빠는 담배만 태웠다. 우리 아빠는 그날 처음으로 이민을 온 것을 후회했다고 했다. 그렇게 그 새끼 아이는 3일 정학을 받았다.


우리 엄마의 온 집이 떠내려갈 정도로 큰 울음소리를 듣고 스티브 할아버지와 캐럴 할머니가 방문했다. 스티브와 캐럴은 우리 엄마의 바디랭귀지를 읽고선 꽤나 심각해졌다. 스티브 할아버지는 우리 아빠와 함께 학교로 곧바로 찾아갔다. 나중에 아빠한테 들었는데 스티브 할아버지가 그렇게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처음 봤다고 한다. 정말이지 온화하신 분이었는데, 발 벗고 나서 학교에 항의를 하고 지역신문에 제보를 한다고 교장을 협박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 아이는 다시는 나에게 접근하지 않겠다고 사과문과 약속을 했고, 그 아이의 부모님은 학교로 끌려와 우리 아빠, 엄마, 스티브 할아버지에게 사과를 했다.

 


"Don't you ever let yourself be treated this way darling. I'm so sorry that this happened to you."

그날, 내 머리를 빗겨주며 캐럴 할머니가 이야기 한 이야기다. 세상 아무도 너를 이렇게 대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할머니가 대신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그때는 그저 왼쪽 눈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줄 알았는데, 스물여덟이 되다 보니 할머니는 나에게 세상을 이야기해준 것이다.


스티브 할아버지와 캐럴 할머니는 내가 중학교 때쯤 돌아가셨다.


하지만 난 평생 기억할 거다. 영어도 못하는 작은 동양인 아이를 무척이나 예뻐해 준 그들 덕분에 나의 유년시절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그들의 따뜻한 애정 덕분에 우리 가족이 낯선 땅에서 얼마나 큰 용기를 얻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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