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오세 종호씨, 나의 아빠.
어린 시절부터, 학창 시절 내내
아빠는 내게 무섭고 힘든 존재였다.
그는 쉽게 분노했고, 쉽게 후회했으며
걱정과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서른이 될 때까지도
그런 아빠가 여전히 불편했다.
그가 언제 갑작스럽게 분노할지 몰라
늘 마음 졸이며 살았고
학창 시절에는 성적표를 숨기고,
그림판으로 되도 않는 조작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공부만 하던 큰 딸이
'음악을 하고 싶어요'라는 말을 꺼냈을 때
분노를 넘어, 허탈함과 원망이 동시에 섞인 그의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나를 사랑한다면서 왜 저렇게 화를 잘 낼까?
뭐가 저렇게 늘 걱정이고, 불만이고, 우울하고 힘들까?
그때는 그 생각뿐이었다.
우리 아빠는 기자였다.
패션 전문 메이저 신문사의 막내 기자부터 시작해,
한 신문사의 대표가 되었다.
아빠는 대표가 된 이후
더 자주 우울했고, 불안정했고,
퇴근 후에는 늘 안방 문을 닫고 산송장처럼 누워만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었다.
그가 먹는 알약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우리 집의 크기도 함께 늘어났다.
좁디좁은 임대 아파트에서,
마침내 그의 이름으로 된 집 계약서 앞에 서게 되던 순간까지.
그가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내가 어른이 되어 사업을 하고,
남의 돈을 받는 직장인으로 살면서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5년쯤 지나서 알았던 것 같다.
그가 많이 아픈 사람이라는 걸.
종호 씨에게는 미안한 얘기이지만
그때의 나는 그가 먹는 약이 무엇인지
그가 혹시 어디가 아픈 건지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날도 여전히
세상 모든 걱정을 다 끌어안고 온 그는,
어김없이 불안함으로 1405호를 채우고 있었다.
늘상 보던 평범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듣기싫은 지겨운 돈 이야기에
언제나처럼 방문을 꽉 닫고,
이어폰을 끼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달력을 보니 역시나 월급날이었다.
직원들의 월급날이면 아빠의 한숨은 늘 배가 되었고
그 한숨은 부모의 싸움으로 쉽게 번지기도 했던 그런 날.
뒤이어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대표가 되고 난 후,
매일 같이 힘든 얘기들을 엄마에게 털어놨다.
오로지 가족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었기에,
유일한 위로가 엄마였겠지만
옆방에서 듣는 나도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는데
엄마는 대체 저 얘기를 어떻게 십수 년을 묵묵히 들어주며 사는 거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엄마의 울음소리와 함께,
아빠가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곧장 엄마에게 달려가
제발 이혼하라고 소리를 빽 질렀다.
'자식 때문에 이혼만은 안된다'는
어리석고 뻔한 대답은 하지 말라고도 덧붙였다.
그러나 엄마는 '아빠 불쌍하잖아. 가족들 어떻게든 지켜보겠다고 열심히 살다가 아픈 사람이 된 건데.
너무 불쌍하잖아 저 사람..'
나는 그날 이후로 이혼하라는 말을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종호 씨는 딸 둘을 모두 대학에 보내 졸업까지 시키고
이제야 본인의 소임을 다 한 듯, 회사를 넘겼다.
넘겼다는 말보다 넘어갔다는 말이 더 맞겠다.
그래, 회사가 넘어가던 그날,
나는 그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봐
사실은 무서웠다.
그가 한강에 뛰어들면 어쩌지
차에 번개탄을 피우면 어쩌지
술을 한 모금도 하지 않던 종호 씨는
처음으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양손에 후라이드 통닭과 양념 통닭 한 마리씩을 사들고
1405호로 돌아왔다.
마흔을 앞두고 있는 지금
아직까지도 후회되는 것 중 하나는
그날 어색하고 삐쭉거리는 표정으로
통닭만 먹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 것,
그리고 종호 씨에게
'너무 고생했다'라고 말해주지 못한 것.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난하고도 깊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육십오세가 된 종호 씨.
그날 한강으로 가지 않아 줘서
번개탄을 피우지 않아 줘서
고마워.
통닭 너무 맛있었고
정말 고생했어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