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하고도 슬픈 마음들

by 이해림



내 옆에만 있어준다면,

어느 날 돈 한 푼 못 버는 거지가 되어도 좋고

두 다리를 못 쓰는 불구가 되어도 상관없다던 사람이 있었지.


어렸을 땐

모든 게 쉽게 사라져 버린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사라지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겠다.


이석원 작가의 책 중

오랜 시간 내 마음에 남아있는 구절.



그를 만나는 동안에도

그가 나를 떠나던 날에도

그와 헤어지고

퇴근 후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울던 많은 밤들 속에서도

늘 저 구절이 떠올랐다.



긴 연애 공백기를 가진,

흔히 말하는 결혼 적령기를

지나도 너무 지나버린 30대 후반의 여자가

소개팅 자리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왜 결혼을 안 하셨어요? 눈이 높으세요?



정확히 내 귀에는


왜 그 나이까지 결혼을 못 하셨어요? 아직도 주제 파악이 덜 되셨어요?

자동 번역되어 들리던 질문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어느 날 돈 한 푼 못 버는 거지가 되어도 좋고

두 다리를 못 쓰는 불구가 되어도 상관없던 사람이

나에게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라고.



적당한 연애

적당한 사랑

적당한 결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다리를 못쓰는 불구가 되었을 때도

나는 그를 지킬 수 있을까 스스로 물었을 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사람과는 평생을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이 먹고 아직도 순진한 생각하고 앉았네

코웃음을 칠 수도 있을 이야기임을 안다.

그러나 나에겐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평생을 그 지겨운 돈이라는 것에 묶여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자신들의 삶과 젊음을 모두 갉아먹어가며

셀 수 없이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면서도

결코 서로를 놓지 않았던 나의 부모를 보면서

사랑이라는 건, 부부라는 건 결국엔 저런 것이겠구나 생각하며 자랐다.


인생에서 찾아오는 많은 고비들을

서로를 할퀴어 가면서도,

손을 맞잡고 하나씩 넘어가는 것.

넘길 수 있는 것이라고.


불행의 아이콘인 나에겐

이미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도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고비와 굴곡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니,

내 부모가 그랬듯 그 고비를 함께 넘어줄 수 있는 사람이 간절했다.





사업이 한창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눈을 뜰 때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손에서 핸드폰을 놓은 적이 없는 채로 긴 세월을 살았다.

머릿속에 매출 말고는 아무것도 담기지도, 담을 수도 없던 때


내 옆에 그가 있었다.



뭐 대단한 사업이라고, 구멍가게 수준의 옷팔이 주제에

대통령보다도 걱정을 많이 할 거라고

스스로 비난하면서도,

나에겐 그 구멍가게가 곧 나의 정체성이자 전부였기에

잃지 않으려 부단히, 아니 미친 사람처럼 바둥거리며 살았다.


사업이 잘 되던 시기에 만나,

여느 연인들의 연애 초반처럼 웃을 일만 많았던

아주 찰나의 시간을 지나,

속절없이 무너져가는 시기를 모두 곁에서 지켜보던 그였다.



사무실에서 여지없이 야근을 하던 어느 날

호흡곤란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가던 순간에도

하얗고 차가운 병실에 누워 있던 순간에도

핸드폰을 손에 쥐고

'아 동대문 사입 넣을 시간인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거래처에 연락을 돌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던 그날,


그는 나의 불행과 고통을 기어이,

기어이 본인의 어깨로 옮겨갔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응급실로 뛰어 들어온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은

토씨 하나 빠짐없이 내게 남았다.



톡 치면 날아갈 것 같은 네가,

그 새벽마다 운동화 끈을 꽈악 동여매고

또 씩씩하게 동대문을 가서 자기 몸보다도 훨씬 큰 짐을 이고 지고

첫 차를 타고 집에 가던 모습을 보며

나는 세상 누구보다도 네가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너는 늘 네가 걱정이 많고, 쉽게 흔들린다고,

왜 이렇게 나약할까 스스로 자책하지만

그렇게 쓰러졌다가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는 너는 어떤 누구보다 강해.

나는 일개 월급쟁이에, 패션의 ㅍ자도 모르지만

도와줄게.

넌 뭐든 할 수 있어. 내가 알아, 그러니까 울지 마.



라는 말을 본인이 엉엉 울면서 했던 그 순간.

몇 개의 링거 줄을 주렁주렁 달고

나보다 더 많이 울던 그를 안아주던 순간, 결심했다.



네가 나를 믿어준 만큼, 더 열심히 해서

평생을 갚겠다고.

나는 꼭 다시 일어나겠다고.

내가 가장 힘들었던 이 시기에,

날 떠나지 않았던 너를 위해

운동화 끈을 더 동여매겠다고.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이 흘렀을까.

어느새 그는 나의 연인이 아닌, 아빠가 되어있었다.



낡아버린 양말 한 짝,

다 해져버린 출근 백팩 하나 새로 사지 않고

그는 나를 도왔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다.

그랬기에 나는 여전히 부러진 다리로, 뛰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서로를 구하고 싶었고

서로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가 퇴근하기 전, 장을 두 손 가득 보고

오랜만에 그의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던 어느 날.



어질러진 방 안, 책상 한켠에

매직으로 신경안정제라고 쓰여있는 약 통 하나

그리고 쓰다만 일기 한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다.



힘들다..

그래도 사랑스러운 여자친구가 예전처럼 많이 웃던 때로 돌아가게 해주고 싶다.

잘될 거야.




한가득 봐온 장바구니를 그대로 들고

모든 기쁨과 슬픔이 담겨있던 그의 자그마한 원룸을 눈에 한번 담고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네가 어느 날 돈 한 푼 못 버는 거지가 되어도 좋고

두 다리를 못 쓰는 불구가 되어도 상관없었다고

너의 휠체어를 밀고 산책을 하면서

내가 가장 초라할 때, 나를 안아줘서 고마웠노라

내리 말해줄 거라고,


끝내 그 말을 해주지 못한 것이

몇 번의 계절이 바뀌어도 마음에 남았었다고.




극악스럽게 힘들었던 날엔

불쑥 너에 대한 원망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그 추악하고도 슬픈 마음들은 조금만 봐달라고.



그리고

이런 사랑을 사는 동안 한 번이라도 해 볼 수 있게

내 삶에 나타나주어서 고마웠다고,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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