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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Nov 08. 2020

북한산 백운대


어제는 북한산 백운대에 다녀왔다.


단풍을 구경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내 계절감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 해 이미 산은 앙상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계절이 어느 지점에 있든 등산객들은 개의치 않는다. 각자 어떤 이유로 산을 오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각자의 사연을 품은 채 백운대를 향해간다. 


열한시가 넘어 출발한 나는 스스로 지각생이라는 생각에 초조했다. 하산 할 때 해가 저물어 가는 허무함을 느끼고 싶지않아서 걸음을 재촉하느라 같이 간 사람이 힘들어 하는 게 보여도 오래 쉬지 않았다. 지금 여유를 부리는 것 보다 얼른 정상을 찍은 뒤 점심을 먹는 게 더 보람되고 뿌듯할 테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백운대는 멀지 않고 힘들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정상을 향한 독기가 바짝 올라 있는 상태에서 백운대에 도착했다. 아직 나의 의지는 남아있는데 벌써 정상이구나. 그제야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잡힐 목표였다면, 아까 자주 쉬면서 경치도 구경하고 같이 간 사람과 담소도 나누고 그럴 걸. 

되짚어 보면 산에 오를 때마다 했던 후회가 아닌가 싶다. 나는 마음을 현재가 아닌 한 발 먼 곳에 두기 때문에 현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항상 하산할 때 죄책감을 끌고 왔었다. 산도 변하지 않고 나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산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나만 변하지 않는 건가?


예전에는 내 부족한 부분을 계속 상기하면서 괴로웠고 가능하다면 성격을 바꾸고 싶었다. 좀더 외향적이고 주도적이고 강단있는 성격으로. 내가 동경하는 성향들을 목표 지점으로 삼아 나를 부정하고 다그치면서 닮아보려 애썼다. 그래도 나의 핵심, 나의 알멩이는 변하지 않았고 나는 지겨운 패배감을 느끼며 다시 나로 돌아온다. 어딘가에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어쨌든 나는 변하지 않고, 나는 그런 나를 이끌고 정상으로 향해야 한다. 그래서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가망이 없어 보이는 성격 개조에는 미련을 버리고 다른 길을 모색해 보기로 했다. 나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그 부분을 어떻게 보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요즘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 내가 내 신체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내가 들 수 있는 무게의 한계를 정한 것처럼,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욕심내지 않고 나만의 구역을 탐험해 보기로.




아무튼 다시 산행으로 돌아오자면. 백운대에 가까워지자 가파른 암벽들이 나타났다. 나는 고소에 공포를 느껴서 바위에서 굽어보이는 아찔한 경관에 겁이 났다. 발은 땅에 붙어있는데도 금방이라도 계곡 아래로 떨어져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심장이 뛰고 열이 나면서 손끝은 하얗게 저려온다. 남들은 위험해 보이는 바위에 서서 사진도 찍고 하는데, 나만 바위에 개구리처럼 붙어서 겁을 먹고 있다. 백운대 정상 까지 오르려면 가파른 안벽을 한참 올라야 하는데, 그 높이를 올려다보니 머리가 핑 도는 것 같다. 


나는 내가 가진 겁이 구차하고 버거웠다. 왜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이럴까. 그 겁이 두꺼운 외투처럼 나를 숨막히게 조이는 것 같아서 얼른 벗어버리고 싶었다. 떨쳐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고소에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을 부럽게 보다가, 내 구차한 공포심을 인정하기로 했다. 무섭지만, 여기까지 와서 백운대 꼭대기에도 오르지 못하고 내려가면 허무할 것 같았다. 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찾다가, 주위에 시선을 두지 않고 바로 내 앞의 한걸음만 보고 걷기로 했다. 죽여주는 경치를 못 보는 게 아쉽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남들에겐 하찮게 보일지라도 나름 엄청난 용기를 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발 한발. 코앞에 닥친 높이부터 처리하면서 암벽을 오른다. 그렇게 오르다보니 정상은 코앞에 있었고, 아래에서는 가파르게만 보였던 높이도 별것 아니었단 걸 알게 되니 겁도 잦아들었다. 계속 아찔한 높이에 노출돼다 보니 익숙해진 건지, 나중엔 용감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거기서 라면에 김밥까지 먹고 내려왔다. 


공포심은 상상력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나는 상상력이 뛰어난 편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를 미워하지 않고, 다만 상상력이 뛰어날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산의 정상에서도 내 상상력은 활개를 치겠지만 어쨌든 한발 한발 내딛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공포심을 극복하면서 산을 오르다 보면 언젠가는 모든 산을 섭렵하고서 그만큼의 자신감을 갖게 되겠지. 아주 자그마하더라도 성취와 성공의 기억. 그런 걸 쌓아가기 위해 다음에 오를 산을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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