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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Dec 22. 2015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팥죽 드셨어요?

한 해의 시작은 어디인가?

그건 마치 하나로 쭉 이어진 내 몸통을 더듬더듬 나눠서 여기부터 가슴, 여기부터 허리 하는 것과 같다.

나는 숫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조상들과 과학자들이 일 년을 마음대로 쪼개서 어느 새파랗게 추운 날  오늘부터  1일이라고 외치는 호들갑 떠는 일에 별로 이견이 없었다. 


그러다 며칠 전 우연하게 읽기 시작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에서 석굴암에 대한 글을 읽고 한 해의 시작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아직까지 석굴암을 직접 본 적은 없고 이 책을 통해서나마 간접적으로 답사할 수 있었는데 현대의 수학과 과학을 뛰어넘는 선인들의 '무서울 정도'의 치밀함에 놀라고, 그렇게 신비한 유물이 일제 손에 해체되고 조립되면서 손상이 심해졌을 뿐 아니라 그 후엔 현대 과학문명이라는 기계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생명 유지를 하고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

아무튼 <스타워즈> 전 시리즈의 떡밥들을 프리퀄 시리즈에서 회수할 수 있듯이, 석굴암 내부의 어떤 것도 의미 없이 만들어진 것이 없어서 저자를 비롯한 학자들이 석굴암에 숨겨진 의미를 해석하는 것에 재미를 느낄 수 있었는데 마치 선인들이 남겨 놓은 수수께끼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셜록 홈즈가 된 기분이었다. 

그 수수께끼 중 하나는 석불사의 석굴이 정확한 동쪽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동동남 30도를 향해 약간 틀어져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오랫동안 의문으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중에 제일 유력한 가설은 석굴의 방향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 동짓날 일출이 지니는 의미는 자못 큰 것이다. 동지는 일 년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한다...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평범한 사실, 그것을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모르고 살 정도로 자연을 멀리하고 살아왔다. 한 해의 시작을 자연변화에서 아무런 징후를 나타내는 것도 상징하는 바도 없는 양력 1월 1일이 아니라, 음이 쇠하고 양이 비로소 일어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인 동짓날로 잡고 살았던 옛사람들의 생활형태가 훨씬 과학적이고 철학적이었던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206p 발췌>




그런 사실을 알고 난 후로 다른 어느 때보다 동지가 기다려졌다. 

우리는 우리의 예민한 감각으로 충분히 새해를 감지할 수 있는데 지나치게 달력을 의지하는 것은 아닐까. 

크리스마스 캐럴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밤이 조금씩 길어지고 나중에는 더 이상 길어질 곳도 없어서 결국에는 태양에게 자리를 넘겨줘야 하는 지경에 이르는 데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늘 긴긴밤이 지나면 내일부터는 태양의 길이가 노루 꼬리만큼 길어진다고 한다. 우리가 서양의 명절을 준비하고 있을 때 새해는 우리의 예상보다 빠르게 오고 있었고 그 뒤 쪽으로 아득하게 봄도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오늘이 새해의 마지막 날 같았다. 오늘 이십 대에 썼던 글들을 모아 읽고 이십 대를 정리하는 글도 한편 끝냈다. 올해의 마지막과 함께 내 청춘도 멀어져 가지만 자연의 순리에서는  한쪽이 비면 다른  한쪽이 차기 마련이다. 나는 청춘을 잃어가는 대신 다른 값진 것을 얻어가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 경건한 마음으로 남동생과 마주 앉아 새하얀 찹쌀 반죽을 굴려 새알을 빚었다.

의미 있는 날이라고 생각해서 일까, 뭐든 대충대충하는 내가 윤기 있고 아름답게 새알을 빚고 싶어서 평소 같지 않게 공을 들이고 있는데 동생이 그런다. 



"어차피 팥죽 하고 같이 끓이면 문드러질 텐데 왜 그렇게 열심히 만들어?"

"그냥  자기만족이야. 꼭 예쁘게 만들고 싶어."



내가 의미를 부여하면 의미 있는 것이 된다.

나는 둥그스름 풍만하게 만들어진 새알이 나에게 복을  가져다줄 것만 같았다. 

옛날 사람들이 귀신을 쫓고 한 살 더 먹는다는 의미로 팥죽을 쑤어 먹었듯이 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새알을 빚었다. 내 태도가 옮아갔는지 삐뚤삐뚤하던 동생의 새알들도 점차 봉긋봉긋 예쁘게 만들어진다. 

얼마나 마음이 뿌듯해지는지 모른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오늘 하루가 그저 그런 화요일이었겠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소망이 담긴 따뜻한 팥죽을 나눠 먹으며 내년의 복을 기원하는 뜻깊은 날이었을 것이다. 






덧.

할머니에게 잠깐 여쭤보니  우리나라에서 크리스마스를 즐기게 된 것은 6. 25 전쟁 후 미군이 들어오면서부터 인 것 같다고 하신다.

그에 비해 동짓날의 기원은 어디까지 올라가야 알 수 있을까.

나는 화려하고 혼란스러운 크리스마스보다 정겹고 따뜻한 동짓날이 더 사랑스럽다.

이제 와서 동짓날을 기리자고 하는 것은 너무 시대착오적인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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