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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Jan 14. 2016

타란티노, 형 영화를 정말 좋아했지

<헤이트풀8>


타란티노 형.


오늘 우리 동네에는 아침부터 눈송이가 흩날렸어.

겨울을 싫어하는 나도 큼지막한 함박눈 소식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고 마침 내가 <헤이트풀8>을 보기로 한 날이었지.

눈밭에서 펼쳐지는 서부극을 함박눈 내리는 날 본다는 건

4D차원을 넘어서는 완벽한 자연적 조건이지, 아마.


형 영화를 정말 좋아했었지.

특히 여러 배우들이  둘러앉아서 별 쓰잘데기 없는 대화를 하는데

그 정신 사나운 라임과 속도 사이에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면서 

그게 진지한 얘긴지 말장난인지 혼란스러워하다가

갑자기 엄청난 일이 우당탕 터지면서 결국 그게 다 조크였구나 깨닫게 될 때,

한 방 맞은 것 같은 그 짜릿함이 좋았어.

대사에도 맛이라는 게 있다면 이게 바로 그 맛깔이 아닐까.

영어는 쥐뿔 알아듣지도 못 하는데 사무엘 잭슨의 억양은 LA갈비처럼 고기 맛이 좋았다고.


주인공들이 미친놈 들일수록 신명이 나고 

뒤죽박죽 된 시간 순서가 맞춰지면서 이 주인공들은 결국 다 개새끼들이며 

곧 다들 가짜임이 너무나 확실해서  뻔뻔하기까지 한 핏물을 주룩주룩 흘려대며 죽어가겠구나,

그리고 이번에는 또 신체의 어느 부위를 어떻게 난도질해서 나를 어이없게 만들까,

그런 기대감으로 마지막 축제의 장면을 향해 달려가는 거지.

뜻밖의 잔인함에 놀라다가도 또 그 멍청한 죽음들에  통쾌해하면서.

역시 마지막은 피칠갑이지! 그런 거 말이야.


근데 형 <헤이트풀8>을 보는데,

이제까지처럼 황당하고 웃기고 긴장되다가 통쾌한 건 똑같은데 뭔가 달라졌어.

형이 아니라 내가. 


영화를 볼 때는 영화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하잖아.

정통 멜로나 휴먼 드라마를 볼 때는 영화하고 얼마든지 가까이 있어도 좋지만

액션이나 형의 영화 같은 걸 볼 때는 거리를 멀리 멀리 둘수록 재밌게 볼 수 있다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그런 말도 있는 것처럼. 


근데 내가 그게 잘 안 되는 거야.

형의 영화는 팔짱 끼고 팝콘 먹으면서 약간은 거만한 자세로 봐줘야 하는 건데

내가.. 내가 너무 진지해졌달까?

나 그게 너무 슬펐어.

대사도 몇 마디 없이 죽어가는 엑스트라를 걱정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그 사람의 인생사나 가정사를 상상하며  안타까워해야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근데 왜 자꾸 하나하나 정을 주게 되는 걸까. 너무나 울적해.


내가 생각해 봤는데,

영화 속에서 익숙했던 배우들이 이제는 나이가 들어버려서가 아닐까.

젊은 사무엘 잭슨은 아무리 죽여도 통쾌한데, 

늙고 대머리 빠진 사무엘 잭슨이 고자가 되는 건 정말이지 너무 슬퍼.

단순 무식했던 마이클 매드슨 아저씨도, 미스터 오렌지도... 

<헤이트풀8>에서 별 활약도 없이 그렇게 픽픽 쓰러지는 게 

날 더욱 슬프게 했던 건 아닌가 싶어.

물론 내가 요새 눈물이 많아진 건 사실이지만서도.


오해하지는 마. 이번 영화가 재미없다는 건 아니야.

다만 이번에는 내가 형의 '뻥'에 걸려들지 않았다는 거야.

이전까지의 영화에서는 뻥이 뻥인 줄 알면서도 그 뻥이 너무 재밌어서 

일부러 그 뻥에 홀리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형의 뻥에 약점이 있었어.


늙은 배우들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만 현실의 시간을 실감하고 말았다. 

정말 나도 쓰잘데기 없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제까지 형의 쓰잘데기 없는 대사들을 들어줬으니 이 정도는 봐줘라.


눈 속에 푹푹 파묻히는 영화 속  가상현실에 푹 파묻혔어야 했는데,

내가 자꾸 영화 밖으로 뛰쳐나가서 미안해.

밖은 너무 추웠고 올해 첫눈이 오고 있었고, 

학창 시절과는 달리 나한테는 세월이 중요해져서 그만 무거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고 말았어. 

그래서 좀 미안스럽고 섭섭하기도 하다. 


근데 지금 집에 와서 이 글을 쓰고 있노라니까 너무나 억울한 생각이 든다.

현실이 어떻든 그냥 그 눈 속에 파묻혀서 늙은 배우들이랑 한 바탕 신나게 놀 걸.

내가 왜 이렇게 쓸데없이 진지하고 무거워졌을까.

나이가 들어가면 이렇게 별스런 걱정에 짓눌려가는 것 같은데

형이랑 다른 배우들은 어쩌면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진지한 얼굴로 웃기는 연기를 해내는 걸까.

나이가 들어가든 말든, 대놓고 조크할 수 있다는 것,

그게 형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형한테 나한테 미안한 이 마음을 덜어내기 위해서

내일 극장 앞에 가서 사람들의 옷깃이라도 털어줘야 하는 걸까.

<헤이트풀8>을 보기 전에는 현실의 걱정은 털어놓고 가라고 말이야.

영화가 끝나면 돌려줄 테니까.

그런데 어쨌듯 아무튼 이 글도 쓸데없는 거지.

결국 함박눈도 그런 거 아니야. 내일 해 뜨면 없어질 텐데. 

그냥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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