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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Jan 25. 2016

파마 만원, 할머니의 세계

알바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버스 안. 

최저시급으로 한 달치 받을 돈을 따져보니 한숨이 나오는데 뒷자리에 앉은 정정한 할머니 두 분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해장국이 한 그릇에 칠천 원이나 하는데 맛이 그게 뭐야.

셋이서 손도 하나 안 대고 이만천 원이나 날렸잖아. 그래서 담부턴 절대 안 간다 그랬어.

내가 가는 덴 한 그릇에 사천 원인데. 스뎅 그릇에 나오는데 얼마나 잘 해주는데."



할머니들의 세계는 아직도 전후의 세계다. 질보다 양이 앞서는 실용의 세계.

양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어서 할머니들은 언제나 겨울을 대비하는 다람쥐들처럼 무조건 모으고 아껴야만 만족스러운 것 같다. 내가 버린 유행 지난 옷들은 다음 날이면 깨끗하게 세탁되어 다시 내 옷장에 들어앉아 있다. 할머니에게는 '유행이 지났다'는 씁쓸한 말이 소용없는 것 같다. 할머니의 눈에는 미식가들도 미친놈들로밖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는 재작년에 받은 찜질방 홍보 로고가 찍힌 둥근  종이부채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봐 그 위에 자기 별명(강아지 할머니로 불린다)과 우리 집 호수까지 적어놓았다. 아마  종이부채 중에 최장 수명을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끝이 너덜너덜해진 그  종이부채를 폐지함에 몰래 버렸더니 다음 날 어떻게 찾아냈는지 멀쩡한 부채를 누가 버렸냐고 냅다 소리를 치신다. 할머니가 중요한 물건이 섞여있을까 봐 폐지를 버리기 전에 폐지함을 꼼꼼히 살펴본다는 것을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일회용은 열 번쯤 다시 쓰고, 옷은 기워입고, 한 달에 몇 번 친구들과 외식을 한다고 옷까지 말끔하게 차려입고 간다는 곳이 아파트 앞 청국장 집이다. 청국장 오천 원, 짜장면 사천 원, 겨울 조끼 칠천 원, 파마 만원...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가격들이라 할머니는 나랑은 다른 세계에 사는 것만 같다. 그러니 내가 머리를 새로 하거나 새 옷을  사 올 때마다 얼마 줬냐고 묻는 할머니 앞에서 우물쭈물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꽈배기 모양 디테일이 포인트인 도톰한 스웨터를 보고 "만원?" 하면서 눈빛을 빛내는 할머니에게  "오만원..."이라고 하면 당장 싫은 소리를 듣게 된다. 



요즘 읽고 있는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어제 본 영화 <레버넌트> 역시 할머니의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는 옷이 닳도록 입어도 흉이 아니고 돈이 없어서 굶주릴 지경에 처해도 게으르다고 타박받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생명을 이어가려는 인간의 의지만이 존중받을 뿐이다. 소유한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이해받는 본질의 세계인 것이다. 강렬한 생존 의지, 사랑과 희생, 정의와 명예...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인간을 평가하는 세계.


지금은 본질의 세계와는 멀리 떨어진 체면의 세계다. 굶어 죽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쪽팔려서 죽고 싶은 사람들은 천지에 널려있다. 내가 좀 더 품위 있는 알바로 돈을 벌고 싶어 하고, 좀 더 많은 돈을 벌어서 그럴싸한 옷을 사고 싶은 것 역시 내 생존과는 별로 상관없는 문제들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얼마나 쓸데없는 것들에 돈을 낭비하며 일부러 돈에 쪼들리고 있는 것인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가 날 봤다면 너무 한심스러워서 비웃지도 못 할 것이다. 


요즘 꼬맹이들은 서로의 집이 몇 평인지 따지면서 친구를 사귄다고 하는데 앞으로는 도대체 어떻게 돼버리는 걸까. 전쟁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 체면의 세계에 절여진 인간들의 개념을 바꿔버리려면 전쟁만큼 철저한 충격이 필요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나같이 한심한 작자들은 '그래도 커피 한잔은 마셔야 해' 그러면서 내일 또 카페로 출근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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