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때가 되면 몸이 기름기를 원하는 것처럼
가끔은 내가 슬픔을 원함을 느낀다.
가까운 일가친척의 죽음을 원하거나
커다랗고 위대한 재앙을 꿈꾸며
살인적인 추위나 절망적인 폭설 따위를 기대한다.
입에 담지 못할 불길함을 바라는 것은
내 안에 악마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슬픔에서 오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슬퍼할 핑계를 찾는 것임을 알았다.
아무도 슬픈 것이 기쁜 것이라 말해주지 않아서
인생이 행복한 사람들 속에서
혼자의 외로운 슬픔을 감추며
나는 답답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외부적이고 강렬한 슬픔이 닥쳐서
이 억눌렸던 슬픔을 살그머니 터뜨릴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여기서는 슬픔이 죄라서
누군가 죽지 않았을 때 슬퍼하는 것은
정신병원에 가야 할 일이라 여기는 것 같다.
다들 행복하길 원하고
행복한 모습만 보이길 원하는 이 세상에서
원인이 불분명한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매일 슬프다.
사람들의 가볍고 일시적인 행복이 슬프다.
그래서 갑자기 미친년처럼 오열하고 싶다.
왜 나는 오열 할 수 있는 사건을 기다리는가.
누군가 죽기를.
재앙이 일어나기를...
행복만큼 슬픔도 기쁜 일이고
나는 딱히 우울한 종자도 아니다.
그냥 사람들이 죽을 것처럼 행복하고 싶듯이
나도 죽을 것처럼 슬프고 싶을 뿐이다.
웃음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답답하고 복잡한 감정이 남아있기에.
왜 다들 웃으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울음 뒤의 웃음이 맑고 투명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