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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Mar 16. 2016

116살의 이



얼마 전부터 찬물을 마시면 이가 시렸다. 이제까지 사람들이 말해줬던 치과에 얽힌 무지막지한 경험담들이 떠오르면서 드디어 내 차례가 오고야 말았다고 생각했다. 나도 곧 치과의 인공조명 밑에서 잔인하게 쑤셔지고 찢길 지도 몰랐다. 그동안 나는 왜 이 닦기를 정성으로 하지 않았을까, 왜 잠들기 직전에 초콜릿을 먹는 안일함 속에서 살았을까. 나는 항상 큰일이 벌어진 다음에 후회를 한다고, 꼭 돌이킬 수 없는 충치에 거린 사람처럼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충치 검사와 함께 미뤄뒀던 스켈링도 받기로 했다. 혹시 '너무 늦으셨습니다.' '이렇게 될 때까지 뭐 하셨어요. 많이 아플 겁니다.' 그런 무정한 말을 듣게 될까 봐 내 차례를 기다리는 내내 마음이 초조했다. 로비에 있던 텔레비전에서 이세돌과 알파 고의 마지막 승부가 펼쳐지고 있었지만 지금 전 우주에서 가장 초조한 사람은 나인 것 같았다. 인간이 인공지능에 지는 것이 뭐 어떻단 말인가. 나는 지금 이 속에 에일리언 같은 충지가 득실득실할 지도 모른다.


나에게 너무나 낯선 분야인 치과, 은행 같은 곳에 가게 되면 고분고분 말을 잘 듣게 된다. 앉으라는 진료 의자에 얌전히 앉아서, 얌전히 굴수록 충지가 적다는 좋은 진단을 해 줄 것처럼 예의 있게 조용하게 앉아있었다. 의자에 달린 모니터에는 오늘 진료를 받았던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 출생 연도가 쭉 적혀있었다. 아마 미처 화면을 바꾸지 못 한 것 같았는데 왠지 나 말고도 충치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약간은 안도하며 환자 리스트를 살펴보고 있었다. 가장 어린 사람이 30세였고 그 위로 5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나이의 다양한 이름을 가진 환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러다가 116이라는 숫자에 눈이 멈췄다. 설마 나이는 아니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출생 연도를 확인하니 1900년 1월 1일 생이었다. 어마어마하다. 116세의 할머니가 내가 앉았던 진료의자에서 치료를 받았던 것이다. 무슨 치료였을까. 틀니나 임플란트. 아니면 자기 이는 하나도 없고 몽땅 이를 새로 심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하면 나는 걱정하던 충지도 아니었고 그냥 단단한 것을 잘못 먹어서 이가 살짝 패인 거라고 했다. 패인 자리가 드러나서 찬물이 닿을 때마다 시렸던 것이다. 왠지 그 할머니 앞에서 엄살떨면 안 될 것 같아서 스켈링도 아무렇지 않게 받고 나왔다.


한국 현대사의 수많은 격동기를 겪은 116살의 이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하나라도 온전히 남아있다면 말이다. 내 이들은 앞으로 내가 살아왔던 것에 3배는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 어떤 충치 예방 캠페인보다 할머니 한 분이 양치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알려준 것 같았다.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살긴 해도 건강은 더 좋지 못 하다는데, 앞으로 살아야 할 엄청난 시간들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은 젊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약간 숙연해진 마음으로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너무 읽고 싶은 책이 많은데 이걸 또 언제 다 읽나 숙연해졌다. 그러다 불현듯 나에겐 시간이 엄청나게 남아있다는 자신감과 독서는 책들 힘과 안경만 있으면 죽을 때까지 계속할 수 있겠다는 나름 똑똑한 계산까지 나왔다. 내가 책 읽기를 좋아하는 것은 점점 자랑할만한 축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많은 시간이 남았으니 나도 책 한 권 내 볼 수 있겠다는 거창한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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