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다
저녁, 일하는 카페로 백발을 길게 기른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베레모만 덮어쓰면 누구나 화가라고 생각할 법한, 늙은 예술가의 전형적인 외양이라고 할까.
예술가들은 염색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백발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거기에다 금속 테두리의 안경, 회색과 갈색이 뒤섞인 고전적인 양복, 느긋한 몸짓...
예술가들이 나이들면 그런 차림을 해야하는 규칙이 있는건지,
아니면 취향도 나이 들어서 한 가지로 모아지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쩐지 카페로 들어선 그 할아버지에게는 고유한 냄새보다는 아류의 냄새,
자기의 개성이라기보다는 고집이 느껴져서 경계하게 됐다.
카페에는 나를 제외하고 한 테이블만 있었고, 한산한 저녁 시간이라 빈 좌석이 수두룩했는데도
할아버지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카운터 앞에서 밍기적 거렸다.
빈자리 투성인데. 뭘 망설이는 거냐.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정체불명의 할아버지를 어떤 인간인가 정의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일행 중에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어서 좀 더 편한 자리를 원하는 건가 싶어서
테이블을 어떻게 옮겨야 하는가 미리 계산하고 있었는데,
일행이 5명이라는 이 할아버지의 말은 너무나 놀라웠다.
"저녁 시간인데, 아줌마들은 저녁 하러 가야 하는 거 아냐?
뭘 나와서 커피를 마시고 있어?"
도대체 무슨 말이야. 어리둥절하다가 천천히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카페의 유일한 손님, 우리 카페에서 가장 전망이 좋고 인기가 좋은 창가 쪽 4인용 테이블에
중년의 엄마와 그 딸이 앉아 있었고,
그 자리가 탐이 났던 예술가 할아버지는 그 손님들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 사람들은 못 들었다고 쳐도 여자인 나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걸까?
노망이 아니면 예술가들 특유의 뻔뻔함이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그 할배에게 예술가라는 호칭을 붙여 주기조차 싫지만,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들어맞는 것.
뒤이어 들어온 그의 나머지 일행들은 모두 백발을 기른 등이 굽고 느릿느릿한 할배들이었고,
앉아서 이러쿵저러쿵 예술에 대해 토론하는 걸 보면 분명 예술가 일당이 맞았다.
아, 그때 내가 느낀 좌절감.
차라리 예술이라고는 같은 이름을 가진 손녀밖에 모르는 평범한 할배들이었다면
어쩔 수 없는 꼰대 기질이려니 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그 따위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예술을 한답시고 저러고 있는 꼴이라니.
게다가 나이가 있다 보니 무슨무슨 이사회 소속으로 어떤 젊은 작가에게 상을 줘야 하나
토론하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안타까웠다.
그 할아버지의 인성을 모든 예술가들로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모든 예술가들이 아무리 아닌 척하고 있어도 그 내면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우월함이 있다.
창조자로서의 우월함.
그렇지만 정말 창조라는 것은 우월한 것일까?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는 괴테와 베토벤의 일화가 나온다.
둘이 산책을 하던 중 맞은편에서 황녀와 그의 일행을 마주쳤다. 괴테는 모자를 벗어 길을 비켰지만,
베토벤은 그런 괴테를 비웃으며 길을 비켜서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오히려 길을 비킨 것은 황녀의 일행이었다고 한다.
베토벤은 정치보다 예술이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예술가가 정치가 앞에서 굽힐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일화는 베토벤의 예술가다운 당당함과 자긍심을 말하고 있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당당함과 무례함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예술가의 거대한 자아를 재수없어하는 게 아니라,
무례하게 굴어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들의 태도가 재수없다.
자신의 자유분방함, 어린애처럼 순수한 영혼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무례하게 굴고
그에 대한 미안해하지도 않는 것이 예술가다운 거라고 착각하는 정신상태. 재수없다.
뻔뻔하고 당당하려면 자기보다 더 높은 경지의 예술가 앞에서 뽐을 내라.
더 위대한 예술가 앞에서는 기도 펴지 못 하면서
주말 저녁에 커피를 즐기는 평범한 사람들 앞에서 무례하게 굴지 말고.
어제 그 할배 때문에 하루 종일 일진이 안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