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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May 17. 2016

또라이 생성 과정



글 쓰면서 용돈벌이를 하기 위해 4개월째 주말마다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달마다 40만 원 남짓의 알바비를 받으면서 덤으로 배운 것은

사람의 첫인상이 어떻게 망가지고 평범했던 사람이 어떻게 또라이로 낙인찍혀 가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줄곧 또라이들을 욕하는 입장이었다가 이번에는 직접 그 또라이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또라이 불변의 법칙'이 진짜라면 이 카페에서 또라이는 바로 나였다. 



1. 첫인상

첫인상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았다. 

내 면접을 본 카페 매니저는 '착하고 성실해 보인다'는 평가를 달았고 

사장은 매니저의 말을 듣고 나를 알바생으로 뽑았다. 

나 역시 친근해 보이는 매니저 언니와 인상 좋은 여사장님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시작은 이렇게나 평화롭고 좋다.



2. 불길한 전조

카페는 6시간 동안 혼자 일하는 구조였고, 

오후 타임으로 배정받은 나는 마감할 때 주방과 커피머신, 화장실, 홀을 청소해야 했다.

일을 시작한 첫 주에는 손이 서툴러서 혼자 마감하는 것이 버거웠는데 

하필이면 혼자 시작한 첫날, 화장실 변기가 막히는 대형 사고가 발생한다. 

변기에는 커다란 '콘 초코'같이 생긴 변이 둥둥 떠다녔다.

나는 구역질을 참아가며 참을성 있게 뚫어뻥으로 변기를 뚫어보려고 했지만

콘초코가 해체되며 상황은 더 끔찍해졌을 뿐이었다. 

상황은 그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매니저 언니에게 조언을 구하니 변기 뚫는 전용 세제를 넣으면 된다고 해서

하라는 대로 했지만 콘초코가 워낙 막강한 건지 변기 수압이 약한 건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일은 바쁘고 손은 서툴고, 화장실만 가면 구역질이 올라오고 그런 정신혼미 속에서 이틀이 갔다.

삼일째도 마찬가지. 삼일째가 되니 화장실을 들여다보기도 싫었다.

결국 뚫어뻥을 죽어라 펑펑 대다가 마지막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다음날 출근하는 매니저 언니에게 상황을 맡기기로 하고 나는 카페 문을 닫고 퇴근했다.

문제는 다음날 상쾌한 마음으로 출근했을 매니저 언니가 

아침부터 콘초코가 둥둥 떠다니는 변기를 발견한 것이고,

언니 입장에서는 삼일 동안 내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으면서 

콘초코를 자기에게 떠넘겼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불쾌하고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하고 일도 대충대충 하는 나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



3. 연속되는 악재

내가 손대는 것들만 망가지기 시작한다.

잘 돌아가던 믹서 날이 고장 나고, 계속 덜렁거리던 콘센트는 내 가벼운 손길에 떨어져 나가고,

화장실 청소를 열심히 했으나 마지막에 들어간 손님이 남긴 휴지조각 하나에 

나는 화장실 청소도 소홀히 하는 뺀질뺀질한 알바가 되었다.

이미 나에게 씌워진 이미지는, 벗어나려 노력하면 할수록 더 강력하게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나름대로 청소에 더 신경을 쓰고 열심히 일 했지만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이미 나에 대해 뒷말을 나눴을 사장님과 매니저 언니, 다른 알바생의 눈빛을 마주치면

왠지 주눅이 들고 자신감이 없어졌다.

나를 못마땅해하는 눈빛들...

이제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사고를 찬 내려고 노력하는 단계.

오늘은 아무 일 없기를. 그런 불안한 마음뿐이었다. 



4. 클라이맥스

이미 나를 뺀질이로 본 사람 눈에는 내가 한 일들이 부족해 보이나 보다.

내가 한 일들은 계속해서 지적을 받았고, 나중에는 뭘 하기가 두려워졌다.

어차피 열심히 해도 나는 부족하고 지적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의욕이 나지 않았다. 

내가 카페에 피해만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장님에게 그만두겠다는 말을 했다.

어쩌면 내가 그만 두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남은 한 달이라도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으로 의욕이 충만해있던 순간,

또 다른 사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거지를 하다가 손이 미끄러지면서 유리컵 하나가 깨졌고,

그 유리조각에 팔꿈치를 찔리게 된 것이다. 

또 사고를 쳤다는 생각에 울적해져 아픈 것도 모르고 일 하다가 

결국 전에 일하던 알바생에게 잠깐 카페를 맡기고 응급실을 다녀왔다.

3 바늘을 꿰매고 13만 원의 치료비를 지불했다.

사장님에게 또 아쉬운 소리를 듣기 싫어서 아픈 걸 참고 나머지 알바 시간을 채우는데 

아프고 돈도 아깝고,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5. 그 후

내 걱정과는 달리 사장님은 나를 걱정해주었고 나도 왠지 모를 죄책감이 덜어졌다.

내 부주의로 유리컵을 깨긴 했지만, 이건 '사고'이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멍청이로 깎아내릴 필요가 없다, 그렇게 내 자존감을 회복하고 있는데

오늘 사장님한테 문자가 왔다.

가게 보험은 손님한테만 적용되므로 직원 부주의로 인한 상해는 보험에 해당되지 않는다.

결국 나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는 얘기.

일단은 알겠다고 했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노동부에 전화해서 관련 법규들을 설명하면 

나는 사장님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완전하게 재수없는 또라이로 확정되는 것이다. 

그게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내 정당성을 설명하려고 해도 한 번 또라이의 말을 들어주진 않을 것 같다. 






장강명의 소설 <알바생 자르기>가 내 이야기 일 줄이야.

뭔가 섬뜩한 것은,

내 상황의 억울함이나 서러움보다

나 역시 누군가를 그렇게 영원히 오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이제까지 살면서 내가 또라이로 확정 지었던 사람들 중에는 억울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내가 만난 또라이들에게 미안해지는 밤이다.

어째서 사람은 자기가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는 상대방의 심정을 완전히 알 수는 없는 것인가.

미안하다. 내가 만난 또라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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